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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과 낙관

by 주윤

차곡차곡 살아온 올해의 마지막 날과 아직 만나보지 못한 새해가 양면 색종이처럼 맞닿은 오늘, 12월 31일. 무엇을 하면 좋을까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어보고자 열 살 아이와 남편에게 질문을 던졌죠.


“올 한 해 최고의 여행은?”

“저는 옆 동 형아네랑 같이 간 캠핑이요! 형아들이랑 캠핑은 처음이었잖아요. “

“난 서울의 밤. 어반자카파 노래에 홀린 듯 나리의 집을 갔다가 이태원을 걸었던 그 여름밤. 한남동을 걸을 때 우리는 제일 나이 많고 주윤이는 제일 어려서 얼른 여기서 빠져줘야겠다며 쭈글해졌던 그 어색한 초저녁 여름밤.”



“올 한 해 최고의 책은?”

“난 허송세월. 김훈 작가님의 내공.”

“난 이거야. 들어봐. 남편, 내가 초코송이 좋아하잖아. 넌 나 좋아하고.”

“아~~ 엄마”

”알지? 박준 시인의 계절산문. 봄에 우리 집 유행어였잖아. 남편, 초코송이 가져다줘야지. “

“주윤이는?”

“저는 이거죠.”



주윤이가 자신 있게 책장에서 꺼낸 책은 육아일기였습니다. 주윤이의 32일부터 365일까지, 주윤이의 시작들을 담았던 저의 육아일기. 어느날 학교 숙제로 주윤이는 자신의 성장의 처음들을 내게 물었습니다. 언제 처음 걸었고, 언제 처음 말을 했냐는 질문에 기억이 안나더군요. 나른한 주말 아침의 저는 약간 귀찮은 마음에 서재방 깊숙이 넣어둔 5권의 묶음을 주윤이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거 읽어봐. 첫 똥 쌀 때 힘주던 주윤이도 있고, 걸음마했던 주윤이도 여기 다 있어.”



주윤이는 며칠을 육아일기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일기 속 사진을 보고 신기하고 귀여워하기도 했고,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죠. 어떤 날은 힘들다고 징징대는 엄마도 만났고, 자주 주윤이가 있어 행복에 겨워하던 초보 엄마의 날것의 사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주윤이에게 어떤 마음이 남겨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주윤이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해 주었으니 기쁩니다. 제 육아일기의 유일한 독자님이자 주인공께서 제게 칭찬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좋기도 하고 이상합니다.



주윤이가 휴대폰 알람을 맞추며 2025년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엄마, 37분 남았어요! 이제 뭐 하면서 기다릴까요? 음~태블릿 볼까요? “

“음, 엄마 생각엔 올해 잘해왔던 일을 올해 끝까지 해보는 거 어때? 엄마는 올해 주윤이가 다양한 장르의 책을 잘 읽었던 거 같아.”

“엄마는 뭐 할 거예요?”

“엄마는 브런치 글을 쓰려고.”

“아! 엄마가 잘하는 일이요?”

“아니, 잘하지는 못해. 꾸준히 했지만. 잘했으면 좋겠다.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올해가 남긴 설거지를 끝내고, 테이블을 행주로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닦았습니다. 오늘의 올해를 내년에게 남겨두거나 미뤄두고 싶지는 않거든요. 내년과 산뜻한 첫인사를 할 수 있게 말끔한 빈자리를 마련해 두니 마음이 떳떳해집니다.



말끔한 블랙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열고 글을 썼습니다. 올해 꾸준히 했던 일을 내년에도 하고 싶은 가 봅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듭니다. 고마운 사람. 일 년 동안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셨던 브런치의 독자님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2024년에 저의 생각을 읽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남편 말에 따르면 퍽퍽해서 닭가슴살 같다는 제 글이지만 어여삐 여겨주신 그 마음에 자주 설레었습니다. 덕분에 마지막날까지 용기를 내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2025년에는 우리 좀 더 수월하길.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부려봅니다. 오늘이니까요.




(아, 어쩌면 근거 있는 낙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 괜찮을거라는 기대는 괜찮았던 지난날의 고마움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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