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 결혼기념일, 계획이란 없는 나는 지난주에야 급히 레스토랑에 예약전화를 돌렸다. 연말 그리고 주말인데 디너 예약은 당연히 탈락. 가까스로 점심 예약은 성공했다.
프렌치 파인 다이닝이니까. 결혼 10주년이니까. 왼손 약지에는 10년 된 결혼반지를 끼고, 팔에는 결혼 예물 시계를 찼다. 오른손 검지엔 이번 10주년 선물로 받은 플래티넘 반지를 꼈다. 남편은 500원짜리 뽑기 하면 나올 것 같은데! 했지만, 나는 은은히 반짝이는 게 꽤나 마음에 든다. 결혼 10년 동안 마련한 작고 반짝이는 것들을 한번 두르니 브레이크가 없다. 오른 손목에 작년에 산 팔찌까지 둘렀다.
오늘은 투머치의 날. 멋쟁이들은 나갈 때 가장 마지막에 몸에 걸친 주얼리 하나는 뺀다던데. 아니요, 오늘은 결혼 10주년인데요. 반지 하나, 시계 하나, 팔찌 하나마다 내 결혼의 반짝이는 순간이 담겨있는걸요.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지요. 화룡정점은 카멜색 가방. 우리 집에 있는 금은보화는 다 모아서 주렁주렁 차고 집을 나섰다.
“남편, 이것 봐!”
남편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 앞에 내 열 손가락과 팔을 반짝반짝 흔들어댔다.
“집에 있는 거 다 하고 나왔네!”
“그렇지~집에 있는 금은보화 다 차고 나왔지. 결혼반지, 시계, 팔찌!”
“시계 양팔에 차고 나오지 그랬어.”
“아! 그 생각을 못했네! 아니다! 그건 내가 산거잖아. 그래서 생각도 안 났나 봐. “
맑은 겨울 햇살이 비치다가도 이내 잔뜩 찌푸려지는 듯하는 하늘에 눈송이가 날리고, 다시 맑은 햇살이 내리던 겨울 오후. 우리의 십 년도 해사하게 웃던 날도, 아무 일도 없던 날도, 흐린 날도 있었다.
“엄마랑 아빠 결혼하던 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었어.”
내리는 눈을 보며 나의 열 살에게 그날의 정서를 나누어주고 싶었다. 운명론자가 되어, 어쩜 이렇게 십 년이 된 오늘도 눈이 온다니! 호들갑을 떨 준비를 장착하고.
“엄마, 이 생선 안 비린 거 맞지요? 휴~”
나의 아름다운 정서 어디 갔니! 열 살 앞에 나의 추억 여행은 바사삭.
“안 비리네! 음.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나도 다시 포크를 들고 첫 번째 메인인 대구 요리를 먹을 수밖에. 어쩔 수 없이 현재의 맛에 감탄할 수밖에. 추억은 또 이렇게 오늘에 덧 입혀지기 마련이니까. 십 년 전엔 하얀 눈이 오늘은 하얀 대구가 되겠구나.
“사진 한 장 부탁드려요. “
웬일로 남편도 흔쾌히 자리를 잡는다. 우리 셋의 십 년을 다독이며 찍힌 사진에 은은한 오늘이 담긴다. 크게 웃진 않았지만 잔잔히 웃는 우리의 표정이 편안하다. 남편도, 주윤이도 겨울의 햇살을 받아 환하다. 그런데 나만, 나만 그늘이 졌네?!
“남편, 집에 있는 금은보화 다 하고 나왔는데 왜 반짝반짝하지 않지? 봐봐, 주윤이는 이렇게 환한데 나는 좀... 그렇지? “
“응!?”
“아! 남편, 이유를 알았어. 귀걸이를 안 하고 왔네. 결혼 십 년 동안 귀걸이를 안 샀어. 바로 그거야! 다음엔 귀걸이다! 그렇지, 남편? “
남편의 어질한 표정은 어쩔 수 없다. 너무나 정답을 찾아버렸으니.
집에 돌아와 나의 금은보화를 다 빼고 츄리닝과 후드티를 입었다. 남편과 주윤이도 캐시미어 니트 대신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우리 셋, 맨발에 크록스를 신고 집을 나선다.
“우리 아까 되게 꾸몄는데, 지금이랑 너무 다르다.”
“그렇지. 이것도 좋아.”
우리의 겨울 장박지로 가는 길. 다시 눈이 내린다. 자이언티의 눈을 bgm으로 삼고 우리의 차를 향해 날리는 눈을 본다. 내 무릎엔 나의 열 살, 주윤이의 고요히 잠든 얼굴이 내려앉아있다.
“우리의 십 년 동안 가장 큰 업적은 우리 주윤이지.”
한 마디로 정리가 되는 순간이 있다. 내리는 눈이 세상에 스미듯, 온 마음에 이 한마디가 스민다. 결혼은 내게 참 잘한 일. 셋이 있어 좋다는 남편이 있고, 내 주윤이가 내 무릎에서 편안하게 잠들어있으니까.
몸이 충분히 따뜻히 데워져있을 땐 찬바람이 부는 밖에 나가도 덜 춥다. 집에서 데워진 마음은 찬 바람 앞에 속수무책으로 덜덜 떨리지 않는다. 우리 셋의 십 년은 우리를 각자의 세상에서 두 발로 서게 해주었다. 가끔 불어오는 칼날같은 찬 바람에도 괜찮다는 마음 하나 쥐어주었음을 나는 안다.
물론, 내년엔 귀걸이다. 행복은 여러 경로로 오니까. 우리 셋도, 금은보화도 모두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