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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Nov 07. 2022

집은 내 마음의 근사한 잔고

  “엄마 밖에 나가잖아? 일할 때 완전 하나도 안 잊어버려! 잘 안 틀려! 다 기억해!”

  “어어? 진짜요?”

  “그럼! 엄마 밖에서 일할 때 장난 아니야. 완전 또이또이하게 다 기억해!”

  “근데, 집에서는 왜 그러는 거예요? 차 키도 안 가지고 내려가잖아요. 휴대폰도. 엄마 간다! 하고 나가면 다시 띠띠띠띠 비밀번호 소리 들리거든요. 엄마가 후다닥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다가 딱 집고 나가는 게 늘 휴대폰이잖아요. 그때 너무 웃겨요.”

  “.... 있지, 주윤이도 얼마 전에 담임선생님과 상담했을 때 선생님께서 규칙을 참 잘 지키는 친구라고 칭찬하시던데. 그럼 집에서는 왜 그러는 거야? 왜 학교 가면 의젓하게 규칙도 잘 지켜? 엄마랑 연산 공부는 하기 싫다고 싫다고 하잖아. 학교에서도 그렇게 해?”

  “아니죠. 학교에서는 안 그렇게 하죠.”

  “근데, 집에서는 왜 그러는 거야?”

  “집은 편하잖아요. 집은 편해야지요.”     


     

  아이의  말이  좋았다. 집은 편하잖아요. 너의 수고한 하루의 긴장이 풀어지는 곳이구나. 그리고 나에게도 집은 휴대폰을, 생활비 카드를 어디에 두었는지 자주 까먹고, 종종거리며 찾으러 돌아다녀도 괜찮은 곳이었다. 그래서 분명 나를 단단히 속이려고 숨어버린 것이 분명한 3 세트인 휴대폰, 생활비 카드,   찾으러 다니는  발걸음은 긴장과 불안의 종종거림이 아니다.  걸음에는 내가 지금 비록 생활비 카드를 잃어버렸지만, 결국엔 집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다. 마치 엄마의 사랑이라는 경험이 너무나 풍요로워서 내가 지금 엄마에게 대차게 혼나고 있지만 결국 엄마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절대 진리를 알고 있는 아이가 흘리는 가벼운 눈물이다. 당장의 속상함도 진실이고,  눈물은 금방 말라버릴 것도 진실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내 휴대폰, 생활비 카드, 차키는 집에 있을 게 분명하니까.



  내 비록 지금 생활비 카드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믿는다. 분명히 내 집에 있다. 또깍또깍 구두를 신고 누가 봐도 빈틈 하나 없어 보이는 근사한 차림으로 차 앞에 섰지만, 아무리 해도 문이 열리지 않는 그때. 그 순간 또 차 키! 하며 나는 아마도 메모리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과 솟구쳐 오르는 화의 불기둥을 두 발에 모두 실어 우아함 따위 버리고 킹콩의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면 해결이 된다. 집에 있으니까. 그래서 내 화는 언제 냈냐는 듯 가볍게 사라진다.          


 

  믿을 구석 하나 있다는 것은 이렇게 힘이 세다. 나는 집 밖에선 깡깡한 사람이 된다. 집 밖을 나가면 나는 보여주고 싶은 나를 보여주느라, 내가 맡은 일을 해내느라,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숨기느라 안간힘을 쓰느라 수고한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해내느라 나는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다 쓴다. 아파트에 입구에 들어와 천천히 주차를 하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를 때에도 나는 그런 나를 놓지 못한다. 나를 놓기에 세상엔 지켜야 할 규칙이 참 많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나는 매너 있는 에티튜드의 근사함을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러다 현관문을 열고 두 발을 내 집에 들여놓는 순간부터 사르르 해동이 된다. 그때부터 나는 빈틈투성이의 내가 된다. 일단 머리를 질끈 묶는다. 참 이상한 건, 밖에서도 난 머리를 자주 묶는 편인데 같은 손으로 같은 머리카락을 묶는데도 집에서 묶으면 왠지 더 우스워보인다. 뭐 그래도 괜찮다. 집이니까. 어떤 날은 바로 씻기도 하는데 주로 일단 들고 왔던 짐을 모두 현관 앞에 내려놓고는 소파로 직행한다. 그때부터 밖에서 꼿꼿하게 힘을 주며 세워놓았던 내 척추는 흐물흐물 힘을 잃는다. 온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하느라 꼼짝없이 고생했을 다리는 허리에 붙어있을 뿐 기능을 잃는다. 드디어 척추도, 다리도 나를 지탱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도 해방이다. 이 시간에도 두 손은 바쁜데, 직사각형의 휴대폰을 쥐고 두 엄지손가락으로 시시한 동영상들과 기사들, SNS, 포털 게시판을 염탐한다.           



  이 게으른 해방의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의 힘과 생각들은 비워지고 나는 가벼워진다. 그 안에 마음엔 너그러움의 잔고가 채워진다. 웬만하면 괜찮은 것들이 내 주변에 채워진다. 그리고 나도 웬만하면 괜찮아지는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고생하고 왔을 남편이 짠해지기도 하고, 학교에 학원을 다녀오며 에너지를 썼을 여덟 살이 짠해진다. 따듯한 밥으로, 간식으로, 그리고 가벼운 유머와 장난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다.           


  balance라는 단어는 균형이라는 중요한 의미 이외에도 금융용어로 은행 잔고의 의미도 동시에 가진다. 내게 balance를 유지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그 방법을 잘 모르겠는 요망한 단어였다. 다만 오늘만은 균형이 이런 게 아닐까 한다. 마르고 건조한 삶을 살아내는 나도 있고, 내가 믿을 구석 앞에서 힘을 빼고 두 발 쭉 뻗을 수 있는 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삶이 아닐까. 그렇게 두발 쭉 뻗으며 마음을 따듯하게 데우며 내 잔고를 쌓아가면, 그 잔고로 밖에 나가서 내 에너지를 쓸 수도 있고, 내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나눠줄 수도 있지 싶다. 그리고 그 심리적 잔고는 매일 깜빡하고 잊어버리고 물건을 놓고 다니는 내게도 스스로 ‘이그~~ 그랬어?’하며 자주 보듬어줄 수 있는 너그러움을 베풀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헝클어진 머리도, 색이 없는 입술도, 작은 구멍이 난 티셔츠 차림도 괜찮아지는 곳. 그렇게 나의 심리적 다리에 힘을 빼고 쭉 뻗을 수 있는 곳.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면 다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해서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는 곳. 내 믿을 구석은 그렇게 오늘도 내 집이다. 여기서는 다 괜찮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의 집을 가꾼다. 내 말투를 가꾼다.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한다. 내 작은 노동과 노력은 내 믿을구석을 오래도록 근사하게 해줄 것이다. 이는 흐물거리고 빈틈있는 나를 싸악 보둠어주는 집의 편안한 근사함에 대한 명랑한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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