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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Dec 06. 2022

우리는 인생의 4/5를 성인으로 산다

  가끔 산술적인 표현이 새삼스럽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새삼스러움은 애초에 모르던 것이 아닐 때가 많다. 평소엔 내 삶을 스쳐 지나가곤 하던 것이 문득 내 걸음을 막아서고 내 앞에 우뚝 멈춰 서서 나를 응시한다.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춰 서서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한다. 진짜? 그렇다고?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다고? 막연히 알던 것이 숫자로 표현되었을 때의 그 실제감은 그 숫자의 크기보다 더 크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오늘 내게 그 숫자는 4/5이다. 100살까지 산다고 하고, 20살부터 어른이라고 한다면 나는 인생의 4/5를 어른으로 살아간다.           



  내가 공부해온 분야는 주로 어린이와 아동청소년을 다루어왔다. 교육심리학이 다루는 영역  중요한 부분은 인간의 발달에 관한 내용이다. 1장은 언제나 발달로 시작하게 마련인데,  시작은 대게 교육심리학계의 위인이자 바이블인 피아제(Piaget)이다. 감각운동기에서부터 형식적 조작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발달단계를 제안한 피아제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발달단계에서 보이는 아동의 특징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재해석하고, 내가 기르는 아이의 발달을 이해한다.



  성격발달의 프로이트(Freud) 어떠한가. 역시나 생의 에너지인 리비도(libido) 집중되는 시기를 중심으로 영아기에 해당하는 구강기에서부터 청소년기에 이르는 생식기까지의 발달단계를 제안한다. 우리는 프로이트를 통해 영아들이  그렇게 빨기를 하는지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과식과 과음을 하고 독설을 하는 이유는 구강기 시절에 빨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생긴 고착이었음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지금 주변 정리를 못하는 이유 혹은 너무 결벽 증상을 보이는 이유는 항문기에 배변훈련을 느슨하게 받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받은 까닭은 아니었을까 하고 이해한다.



  물론 사회성의  생애적 발달 단계를 제안한 에릭슨(Erickson) 같은 학자의 이론을 학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 발달 단계 이론들은 영아기에서 아동청소년의 발달단계를 설명한다. 이렇게 현재의 우리는 이론을 통해 과거에 안갯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나와 나의 경험을 마주한다.  과정에서 과거의 나를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며 보듬어주기도 하고, 감사와 위로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노력을 약속한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는데 과거의 이론들은 도움을 준다.         


 

  나는 지금 마흔이다. 성인으로 2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2배의 시간인 40년을 살 예정이다. 80까지 산다면 지금만큼을 더 살아야 하고, 100세까지 산다면 40년에 20년을 더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 지금처럼 살면 된다고? 나는 이제 보호해주고 싶은 어린이도, 질풍노도를 견뎌줄 부모님 그늘에 있는 것도,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미혼도 아니다.           



  나는 집에서는 남편과 오늘 보낸 하루를 농담과 함께 위로하며 저녁을 준비해 먹는 일을 주로 하는 아내이다. 동시에 남편과 함께 아들 숙제를 봐줘야 하고, 지난밤 맥주에 과자를 먹고 늦게 잤다고 하더라도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아이 식사를 챙기고, 주말엔 피곤해도 아이를 데리고 잠깐이라도 나들이를 다녀와야 덜 미안해하는 엄마이다. 그리고 틈틈이 아이의 학교와 학원 라이딩을 해야 하고, 중간중간에 간식을 마련하는 것, 상담이나 공개수업 같은 학교 행사가 있으면 열일 제쳐두고 도로의 무법자가 되어도 학교에 참여해야 하는 것도 엄마로서의 내 몫이다.           



  동시에 나는 가르치는 일을 위해 수업자료를 검토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강의자이기도 하다. 잘 가르치기 위해 제대로 배워야 해서 읽고 검색하는 것, 그리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수업자료를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인다. 공부를 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과거의 생각인 이론을 제대로 전달해주는 것도 나의 몫이고, 학생들에게 과거의 생각인 이론을 도구 삼아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도 내 몫이라고 여긴다. 정확한 이론 설명과 학생들의 생각을 말과 글, 그리고 이미지로 표현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어떻게 해볼까 고민한다.           


  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역할을 위해서도 애를 쓴다. 바로 가끔 엄마, 아내, 강의자 역할을 떠나서 누군가의 친구 김주윤으로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자타공인 친구 없는 사람인 나는 얼마 없는 내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다. 어떻게든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 약속을 하고선, 막상 만나면 약속을 잡을 때의 치열함은 간데 없는 시덥지 않은 농담만이 가득한 시간을 보낸다. 나와 친구들은 서로의 일상 속 시시콜콜한 시시한 농담들이 오가는 시간을 위해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다. 이렇게 전혀 비생산적인 대화들을 나누고 오면 내 일상의 화분은 물을 머금어 촉촉하고 환해진다.      



  이외에도 나는 엄마와 아빠의 딸이고, 시부모님의 며느리이자, 언니의 동생이고, 동생의 누나이고, 시동생의 새언니이다. 교수님의 제자이고, 선배님들의 후배이다. 주윤이의 친구 엄마들에게는 주윤이 엄마이고, 주윤이의 학교와 학원 선생님에겐 주윤이 어머님이다. 인간관계가 좁은 편인 내가 이 정도인데, 아마 마흔 언저리의 우리들은 부캐 부자가 틀림없다.          


 

  나는 이렇게 부캐 부자여서 할 일이 많은데 나 스스로가 못 미덥다. 스스로에 늘 의심이 든다. 이거 맞나? 빼먹은 거 없나? 아니! 뭐 하나 빼먹은 게 틀림없어! 그럼 그렇지! 언젠가부터 어디에 놓고 온 게 분명한 구멍 난 메모리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의 의심은 대부분 확신으로 다가온다. 전신마취로 애를 낳아서 그런 건가, 단순한 뇌의 노화인가, 아니면 뇌의 가지치기? 아닌데, 계속 쓰는 부분이 아닌 안 쓰는 부분을 가지치기하는 게 뇌인데...           



  의심과 겸손의 하루들을 쌓아가는 마흔의 겨울,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다가 하나를 배웠다. 마흔의 큰 수확. 바로 성인기 발달 이론이었다. 그동안 아동 연구를 주로 해오던 차에 관심 두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강의 교재를 선정하고 강의계획을 짤 때, 간혹 내가 더 공부해보고 싶고 학생들에게도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선정하는 주제들이 있다. 이번 학기, 그중 한 주제가 성인기 발달이론이었다. 성인기 발달 이론은 성인기가 맞닥뜨리는 현실과, 잘 살아온 삶이 가지는 낙관, 그리고 웰 다잉이 건네주는 오늘의 삶에 대한 부드러운 조언이 담겨있었다.                


  성인기 이론들 중에는 마흔의 내 어깨를 들썩들썩 이게 해주는 내용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바로 성인기 인지발달이다. 과연 인간은 언제 인지기능이 최고조에 달할까? 나는 막연히 인간의 인지기능도 신체기능이 최고조에 달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왔었는데, 성인기 인지발달을 연구한 Schaie는 지각 속도를 제외한 언어이해, 수 계산, 공간능력, 귀납적 추론 능력이 성인 중기에 최고 수준이었음을 밝혔다.           



  아니! 성인중기는 내 나이 마흔이 시작이 아닌가? 그래, 생각해보면 중년들의 선택들은 우리 삶의 방향을 제안해왔다. 연구자들과 기업의 팀장급 책임자들, 그리고 학령기(초등~고등) 자녀를 기르는 학부모의 나이는 대부분 이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직업인으로서, 연구자로서, 부모로서, 아내로서 최선의 선택을 위해 가능한 선택지를 모두 검토하고 상황을 파악하여 가장 최적의 선택을 내려야 하는 고도의 추론적 사고를 해낸다. 그 선택의 실행이 책임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신중을 가하기 위해 자료를 탐색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동시에 나의 가치를 고려한다.  



  성인기 인지발달 이론에서는 발달단계에 따라서 배움의 목적이 이동함을 밝히기도 했다. 청년기에 ‘무엇을 배울까?’를 고민했다면 성인기에는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할까?’로 배움의 목적은 이동한다. 즉 우리 중년기에는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위한 능력인 말로 표현되는 생각을 이해하는 능력, 수학적 계산능력, 자극을 공간에서 시각화하고 정신적을 회전시켜보는 능력, 문제 상황에서 패턴과 관계를 이해해서 다른 문제에 적용하는 능력은 빛나는 시기인 것이다.          


 

  그래, 나의 중년기는 지각 속도는 청년기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나는 기억력도 감퇴하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차키 없이 나와서 도무지 열리지 내 차 앞에서 경험했던 자괴감의 기억과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으나 주머니에 없던 휴대폰 때문에 다시 들어가야 했던 분노하는 내 발걸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영양소를 고려하여 내 가족의 마음과 배를 부르게 할 식단을 떠올릴 수 있다. 아이가 학교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가능한 여러 대안을 제안해줄 수 있다. 비로소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글을 찾아 즐기며, 때론 줄을 그어가며 읽고 이 내용을 저녁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남편과 대화할 수 있다. 강의를 준비하며 이론을 제대로 전달함과 동시에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함께 제시하고 어렵지만 학생들의 인지적 불균형 상태를 유발할 수 있는 질문을 제안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떠올린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지금 내게 중요한 가치는 배움이다. 내가 아무리 깜빡쟁이여도 내가 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배움이라는 가치가 내 삶의 곳곳에 스며듦의 중요성은 잊지 않기 위해 되새긴다. 이 가치는 내가 중년기에서 노년기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해준다는 것도, 이번 공부를 통해 배웠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블로그 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독학으로?”

  “아니, 독학은 어렵고, 옆에 선생님께 배우고 있어. 이제 내가 직접 하려고.”

  “이궁, 우리가 배울게 많아. 그치?”

  “그러게!”

  “남편! 우리 나중에 노인대학! 요즘은 평생교육원인가? 여튼 거기 CC 하자!

   물론 다른 과로!”

  “ㅎㅎ그러자!”          



  20대 대학 캠퍼스에서 못해본 CC를 평생교육원에서 해보게 생겼다. 이 정도면, 나의 중년기와 노년기도 꽤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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