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겪는 자를 대할 때
부모, 배우자, 연인, 친구, 의사, 전문상담가, 목회자 등등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 현실 안에서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타인' 이다. 하지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타인' 이기도 하다. 기대하는 만큼 상처도 크다. 가까운 만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타인'이 주는 상처는 덜 아프다. 그러려니 하니까..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면서 스스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바벨탑 사건 뿐만 아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신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 중 하나가 타인의 아픔을 대할 때이다.
"인간은 결코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아픔만은 실제보다 크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이 땅에서, 타인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없기 때문이다. 타인은 타인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럴싸한 학문적 지식과 해석과 해법은 교과서와 각자의 경험 속에만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상당히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 '당연한' 것은 분명 상처가 된다. '그래야만 하는' 것도 그렇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얘기는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뻔한 위로와 가르침에 듣는 자[위로가 필요한 자]가 부정적 반응 - 회피, 분노, 공격 - 을 하면 우리는 또 그 사람을 비난한다.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남 탓만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더 큰 상처를 입고, 더 깊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만약 그게 되는 거였다면, 당신의 위로는 애당초 필요 없었을 것이다. 뻔한 얘기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을 뿐이다. 성경에 보면, 고난을 당하는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 왔던 친구들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대로 있다.
결국,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로의 초석이 된다.
그리고 진정한 위로는 말 그대로 '위로부터' 온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더 나을 지 모른다. 구걸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헐 벗은 자에게 옷을 구해 주는 것,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 들어 주는 것.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스로 쉽게 할 수 있는 거였다면, 그 사람은 위로를 받기 위해 당신 앞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