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실에 있던 부인과 여자환자였다. 해당 과에 1인실 병동이 없어서 1인실이 빈 우리 병동에 입원해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궁 낭종 수술 후 통증 조절과 수혈을 통한 빈혈 치료를 하고 있었다. 며칠의 오프 후 출근 한 그 날 그녀를 처음 맡게 되었다. 첫 라운딩을 갔을 때 그녀는 RBC(농축적혈구)를 주입중이었다. 수혈하는 혈액제제 중 RBC는 보통 혈액검사상 Hb(헤모글로빈) 8.0g/dL 이하일 경우 주치의의 처방에 따라 몇 개의 RBC를 주입할 것인지 그 개수가 정해져 주입된다. 그녀는 수술 중 출혈이 조금 있는 편이라 그 날 총 3개의 RBC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보통 매 근무의 첫 라운딩 때 ‘오늘 하루 잘 해 봅시다’의 의미를 담아 “안녕하세요~”밝은 인사를 환자들에게 했다. 그녀에게도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부터 담당간호사구요, 어디 불편하신 데 없으실까요?”라고 근무의 시작을 친절로 시작하면서 주렁주렁 달린 수액들을 정리하며 혈액이 잘 주입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RBC가 주입 시작된지는 1시간 가량 지났고 절반 가량이 남아있었다. RBC수혈은 1 unit(혈액제제 단위)에 200~250ml 용량을 2시간 ~ 4시간 동안 들어가게 하는데 딱 적당한 속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피도 잘 들어가고 있네요. 어지럽거나, 열감이 있거나 다른 힘드신 거 있으실까요?”
“이 피 상했잖아요. 당장 빼요.”
“네?”
“이거 상한 피 당장 빼라고요.”
“피가 상했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유학도 갔다 온 똑똑한 사람이고, 우리 막내아들도 의대 1학년이야. 다 아니까 이거 상한 피 빼라니까 뭐하고 서있어.”
“혹시 왜 상했다고 하신건지 알 수 있을까요?”
“이거 냉장고에 있다 나온 피지? 이렇게 실내에서 그냥 들어가는데 1시간이 지났어. 상했잖아.”
‘아, 모르니까 그럴 수 있지.’하고 차분히 답변했다.
“냉장보관은 맞아요. 그런데 상온에서 2시간에서 4시간까지도 들어가게 하고, 또 너무 빨리 들어가게 되면 제대로 흡수가 안 될 수도 있어요. 수술 끝나고 빈혈 수치 때문에 수혈하시고 계신데 지금 빼시면 안될 것 같아요.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도 없고요”
“너 지금 나 무시하는거야? 나도 다 안다니깐. 뭐하는거야 지금? 너 맘에 안드니까 나가. 다른 사람 오라고해.”
웃으면서 그녀에게 첫 인사를 한지 오분이나 지났으려나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내 얼굴도 잔뜩 붉으락푸르락된 상태로 문을 닫고 나와 부인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 000환자 담당 간호산데요. 환자 RBC 3-1(주입예정이었던 세 개 중의 첫 번째라는 의미) 반 정도 들어갔는데 피 상한거 같다고 하면서 수차례 설명했는데도 무작정 빼라고 하네요. 지금 간호사랑 대화 거부하는 상태고요, 선생님이 오셔야 될 것 같아요.”
곧이어 그녀의 주치의가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도 나와 비슷한 얼굴빛을 띠며 간호사실로 왔다.
“선생님,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주치의에게 물었다.
“폐기하고 뒤에 것도 다 처방 취소할게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주치의도 절레절레하며 답했다.
병실 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를 고민했지만 다시 그녀를 마주하기 싫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더 늦게 갔다간 온갖 황당한 컴플레인이 더 심해질 것 같았다. 결국은 함께 근무하던 동기에게 환자와의 트러블 상황을 설명을 하고 대신 처치를 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하게 되었다. 동기는 망설임 없이 “내가 할게!” 라며 나서줬고 그 날 주사약이라든가, 먹는 약이라든가 모두 미뤄주게 되었다. 그런 동기가 걱정되어 “지금은 좀 어때?” 라고 물었다.동기는 “아무렇지도 않던데? 그리고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자기가 공황장애가 있어서 가끔 화가 나면 말을 막한다고 이해 좀 해달라던데... 전해달래...”
학교 때 배운 ‘공황장애’에 대해 떠올려봤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으로도 부족해 인터넷에 공황장애의 증상에 대해서 검색까지 해봤다. 내 기억이 맞았다. 아까 낮과 같은 그런 일방적 화는 증상에서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사과를 받기 싫었다. 그 때는 한참 혈액량이 부족해 수혈도 혈액공급이 되는대로 어렵게 하던 때였다. 수혈을 중단하게 되면 담당 간호사, 의사가 ‘혈액폐기사유서’ 도 작성해 진단검사의학과의 혈액은행에 내려야 한다. 그만큼 그녀가 거부하던 적혈구 혈액도 누군가는 애타게 기다렸을지 모를 소중한 피였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의 화가 다 누그러졌다니 이제 나를 거부하지 않을 것 같아 퇴근 전 마지막 처치를 직접 하려 그녀의 병실에 들어갔다. 면회 온 아들과 이야기 하고 있던 그녀는 내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갑자기 자는 척을 했다. 모르는 척 하며 그 의대생이라는 아들에게 현재 투약할 약에 대해 설명하고 “주무시네요. 혹시 밤 동안 문제 생기면 간호사실에 바로 말씀해주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병실을 나왔다.
몇 시간 전 동기에게 환자가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사과? 안받을거야. 나도 기분 나쁘지. 내가 뭐 갑자기 화내고 소리지르는 것도 다 이해해줘야되는 사람이야? 우리 완전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나는 사과해도 안받아.’ 라는 분노 그 자체였다. 그런데 나란 사람은 참 단순해서 그 불과 몇 시간 전의 분노에 찬 다짐은 다 잊었었나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서운했었다. 당연히 그녀가 나에게 사과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 때문에 일어난 일에 먼저 손을 내밀기란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실망감은 크게 다가왔다.
정말 작은 일로, 혹은 아무런 관련 없는 일로 의료진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고객의 소리를 적는다고 협박 섞인 발언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그런 아주 사소하지만 힘 빠지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일들이 한바탕 지나간 후에 하나같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이해 좀 해주세요.’라는 말이다. ‘나의 이해’와 ‘그들의 이해’가 혹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나? 생각이 든 적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 마음은 돌덩이가 아니다. 말을 안하면 모른다. 또는 알면서도 모르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대화를 나눈다. 그 중 가장 소중한 단어는 어쩌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가 아닐까한다. 거기에 진심까지 곁들어진다면 금상첨화다. 어쩌면 솜사탕 한 입이 녹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얼어붙은 서로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