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나이 오십

1막 그래서 # 아! 명함이 없다.

by 제이 유

친구가 지난 달 은퇴를 했다. 은퇴하고 둘쨋날, 우연히 전화를 걸었다가 사실을 알았다.

점심 시간. 후다닥 달려가 친구와 커피 한잔을 마주한다.

위로 할 필요도 없이 친구의 표정은 밝았다. 쉼없이 몰아친 일 속에서 모처럼 찾아온 휴식이 반가운듯

보였다. 그럼에도 뭔가 여운이 남는 아쉬움을 뱉는다.

"아! 명함이 없는 거야. 생각도 못했지. 은퇴하고 그 다음날 주말에 행사가 있어서 갔는데

그런데 오면 다들 명함부터 꺼내들잖아.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 나 어제 은퇴했지..이제 명함이 없구나!'

그 생각이 스쳐 가더라구. 그래서 어째. 솔직하게 말할 용기는 안나구 명함을 안 들고 왔다고 둘러댔지.

마음이, 마음이 좀.. 그렇더라..."

이해했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은퇴의 시기. 언짢은것도 아니고 반가운것도 아닌 그 마음을

무슨 색으로 칠할 수 있을까?

곧 명함이 없는 인생을 마주하리라. 두려울까? 아쉬울까? 아니면 반가울까?

대학을 졸업하고 내내 명함에 휘둘려 살고 있다.

조직 속의 일원으로 자리를 바꾸며 명함도 나의 일상을 따라 모습을 달리했다.

그 조그만 종이안에 나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 이름 석자와 직급 두어자 조직 두어자 담은 뒤

사람을 만나면 각자의 인생을 교환한다. "나 이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명함을 갑자기 잃고 나면, 적응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어제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홀로 남은 나를 인정하는 일은 간단치 않을 수도 있다.

너무 오랫동안 많은 이들 속에 넣어 둔 '나'를 불쑥 꺼내가기란 익숙치 않다.


한 단체에 계시던 선배 한 분이 60을 넘어 은퇴를 하고 그 다음날 모임에 갔다고 했다.

가는 길에 생각하니 명함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망설이던 선배는 가던 길 멈추어

거리에 흩어진 예쁘고 고운 낙엽 몇장을 들고 갔다고 했다.

정성껏 먼지를 닦아 손수건에 담아 들고서 말이다.

서로가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돌리는데, 선배는 손수건에 싸인 낙엽을 꺼내들었다.

"이제 제 명함이 바뀌었습니다. 종이 명함 대신 이렇게 자연인으로 돌아왔어요.

곱게 익은 낙엽처럼 오롯이 제 인생속으로 들어가보려구요. 이 낙엽이 저의 새 이름입니다."

선배의 낙엽 명함에 사람들은 동정을 보냈을까? 응원을 보냈을까?

주변인들의 속마음이야 알 수는 없다. 다만 선배님은 조금은 씁쓸하더라고 속내를 밝혔다.


명함이 없어지면 어떠랴.. 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나 역시 잘 다니던 방송사에 멋지게 사표 날리고 미국으로 떠났던 시절이 있었다. 1년동안 미국 애틀랜타에서 원없이 놀고 원없이 공부하고 원없이 엄마놀이하며 가족들과 보내다 한국으로 돌아와

딱 한달간을 명함없이 살았다. 명함이 사라진 인생속에 또 다른 명함을 찾아야한다는 일말의 강박관념.

그래도 젊은 날의 잠시 멈춤은 희망적이었다.


중년에게 멈춤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버려지는 것이 아픈 게 아니라 버려질까 두려운 마음들이 더 아프다는 중년들의 세상.

진정 버려야할것과 취해야 할 것을 알아가야 하는 나이는 더욱 조심스럽다.

그래서 우리에게 명함은 빈 괄호를 채우는 일이다. 나에게 명함은 ( ) 이다.


괄호를 채우며 중년을 지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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