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그래서 # 엄마를 미워해
친정엄마 생신이 코 앞인데 마침 생신이 낀 그 주에 일이 많아 도무지 서울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엄마, 코로나 때문에라도 엄마 안보는게 나을것 같아! 이번에는 바쁜 일이 많아서 일단 생신용돈부터
보내요. 바쁜 일 정리되고 나면 서울에 한번 들릴께요. 죄송해요!"
해마다 엄마 생신과 아버지 제사는 잊지 않고 챙겨 올라갔는데 어쩌다 한번 결석하는 큰 딸에게 따뜻한
인사는 커녕 엄마의 대답은 시쿤둥하게 돌아온다.
"코로나? 아유, 그래! 오지마 오지마. 조심해야지. 그런데 네 동생은 어제 왔더라. 신경 쓸 필요 없다. 일 봐!"
툭 끊어지는 엄마의 전화. 말 끝에는 강력한 서운함이 묻어 있다.
올해 88세. 높은 연세에도 할머니보다 아줌마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만큼 정정한 울 엄마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못한다. 어린 시절, 종종 상처를 받은 나는 그럴때마다
엄마를 미워했다.
"엄마는 왜 좀 더 따뜻하게 말 못해? 왜 그럴까 하고 한번 생각해보고 말씀하심 좀 좋아요.."
타박하는 딸 앞에서도 엄마는 무 자르듯 말을 자르셨다.
"엄마도 환경만 됐으면 너처럼 많이 배우고 폼나게 살았을거야. 그럼 말도 폼나게 했겠지..
너도 엄마처럼 한번 살아봐라.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언제 그런걸 다 살피고 살아! 사는게 더 중요했어."
질척한 삶의 굴곡은 엄마를 현실 속으로 끌어갔다. 누군가를 배려하기 전에 버텨내야 하는 고단한 일상에서
상대의 아픔보다 눈 앞에 마주한 현실을 헤쳐가는게 더 버거웠을터.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절, 투박했던 엄마들의 지난 세월을 이해하면서도 직설적인 엄마의 말투에
여동생들은 가끔 불만을 토로했다. "엄마가 그럴때마다 너무 서운해!"
엄마와 여동생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래될수록 중간에 낀 나는 양쪽을 오가며 불꽃을 진정시켰다.
무뎌질만도 한데 아직도 엄마의 그 솔직한 말투가 독설처럼 서운함을 만들어낸다.
"큰 딸! 이번에 준 축의금은 조금 작던데. 돈도 많이 버는 딸년이 조금 더 주면 좀 좋아! 아니다! 됐다 됐어.
내가 뭐 더 바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래, 고마워!"
도무지 이런 말을 듣고 나면 고맙다는 건지 서운하다는 건지 내심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 집 둘째딸 알지? 걔가 청주 사는데 엊그제 친정와서는 제 엄마한테 목돈을 쥐어 주고 갔다지 뭐냐.
부럽냐구? 아이구. 부럽긴. 내 팔자에 무슨 그런 복이 있겠어! 그래도 너희들이 잘 챙겨주잖아.."
이건 잘 챙겨준다는 말인지 더 챙겨달라는 말인지 역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한다고 열심히 하는데도
직격탄을 날리시면 가끔은 공들인 일이 수포로 돌아간듯 허무해서 나 역시 궁시렁 거리며 엄마를 원망했다.
그런데 늙나보다. 어느날부터 그 미움속의 엄마가 아프게 보이기 시작했다. 먹기 싫으면 무조건 버리고 마는 '내'가 아니라, 먹을 수 있으면 어찌되든 먹게 만들었던 '엄마'의 삶이 마음에 들어왔다.
엄마의 부엌에는 아직도 20년째 엄마의 주방을 지키는 낡은 전자렌지와 뚜껑 달랑거리는 전기주전자가 있다.
막내여동생이 새 주전자를 사왔다가 엄마에게 눈물빠지게 야단을 맞고 반납을 했다.
쓸만한 주전자를 왜 바꾸냐는 질타에 여동생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주전자를 들고 나갔다.
세번씩 발로 꾹꾹 밟고 위 아래로 두어번 내리치고 온 몸으로 짓눌러야 마무리가 되는 팔순 엄마의 쓰레기봉투. 재활용, 삼활용, 사활용까지 이어져야 하는 엄마의 주방 비닐봉투.
꼬투리하나 허투루 버리지않아 봉투 봉투 모아 둔 엄마의 보물 냉장고 속 음식 재료들.
고춧가루통으로 소금통으로 변신하는 만 '쓸모 있어진' 다양한 재활용 용기들.
그 날내나는 삶의 흔적 속에서 어느날 부터인가 나는 '내 엄마'와 마주하게 되었다.
"에고. 일 좀 작작해라. 건강 생각하구.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엄마 보러 올 시간 없지? 그래. 일해 일해.
에구... 엄마야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언제 죽어도 안 이상하지. 신경 쓰지마. 시간없는데 네 일이나 잘 해!"
아, 울 엄마의 이 솔직한 독설 앞에 나는 이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다.
보고 싶으니 꼭 한번 오라는 엄마의 절절한 외침이 이제는 또렷하게 들린다.
예전 같으면 또 시작이네 하고 엄마를 미워했을 내가 아닌가.
나이 오십에 드디어 마주한 '엄마'의 진짜 속내, 그 투박한 '진짜 속내'가 찡하게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