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의지하는 존재들은 나를 통해 힘을 얻고 살아갈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나에게 의지하는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없던 용기도 생긴다. 그들은 내가 애정 하는 소중한 것들이라 내겐 특별하다. 보석과 같고 상록수 같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의 보석들이 그렇듯이 실용적인 가치보다는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여러 가지 유물을 종합해 볼 때 고양이는 적어도 4000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식량이나 물건을 쥐로부터 보호하는 게 그들의 최우선적인 임무였다. 예전에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있었다. 새끼 때부터 키웠는데, 어찌나 영리한 지 화장실 훈련(toilet training)이 다되어 있었다. 대소변도 지정된 곳에서 했고 모래로 묻기까지 했다. 고양이도 재롱을 피우기는 하지만, 개와는 달리 주인의 눈치를 별로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는다. 까칠하고 도도한 게 오히려 고양이의 매력인듯하다.
고양이를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접종이나 수술 등 이런저런 이유로 동물병원에 갈 일이 많다. 지인 중에는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지만 길고양이를 입양해 키우는 사람이 있다. 길고양이는 집안에 갇혀 있지 않는 자유를 얻은 대신 추위는 물론 위험과 끼니 걱정을 늘 해야 한다. 집 고양이는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그의 운명은 전적으로 주인에 달려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인이 자신에게 의지해 사는 고양이들로부터 살아가는 힘을 얻고 있다. 장녀는 리틀 마더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는 타고난 마력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어려도 자신이 무리를 이끄는 위치가 되면 책임감이 생겨 그 위치에 걸맞은 정신적인 연령으로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듯하다.
그녀의 SNS에 포스팅된 내용을 보면 그런 사실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시튼의 <동물기>에 보면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들의 겁에 질린 목소리를 듣고 용기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동네에서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새끼 고양이들을 이끌고 다니는 어미 고양이를 보면 왠지 진지한 위엄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하늘 공원 정상 부근에서 본 어미 고양이도 다르지 않았다.
요즘 고양이의 지위는 예전과는 다르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처럼 던져지거나 같이 자던 아이들이 깼다고 엉덩이를 찰싹 맞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정집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저 쥐 나 잘 잡으면 밥은 얻어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요즘은 반려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가족과 동등한 지위에 올랐고 수명을 다해 죽게 되어도 여간 애통해하는 게 아니다. 고양이 전용 전동 장난감도 다양한 종류가 나와 있다. 인간과 동급 또는 그 이상의 지위를 확보하는 건 시간문제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