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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옥 Nov 22. 2021

올리브나무 사이로

학교에서 나와 만난 나의 아이들에게

 31. 등기 우편물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그날 마침 내가 당직이어서 학교에 나가 행정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학교는 조용했다. 그해는 2학기말 고사를 방학 전과 개학 후로 나누어 치르기로 해서, 개학 후에 시험을 보기로 결정된 국어 과목의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있었다.     


 우체부가 다녀갔다.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 왔는데, 그 중에 등기물도 하나 섞여 있었다. 관습대로 내가 도장을 찍고 받아서 우편물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나는 시험 문제 출제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등기물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해 두면 선생님들이 행정실에 들러 자기에게 온 우편물을 가져가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은행에서 어느 선생님에게 발급한 신용카드였다. 등기물이 무엇인지 우체부에게 확인하고 그 선생님에게 전화로라도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그런데 방학 중인데 왜 수령지를 학교로 했을까. 지금도 조금 이상하긴 하다.

 개학하고도 석 달이 지난 뒤에 사달이 났다. 나에게, 그 신용카드를 누가 가져가서 무단히 사용했으니, 카드 사용료를 물어내라는 내용증명이 왔다. 신용카드를 수령해야 할 선생님은 마음에 병이 들어서 개학 직후에 병가를 내고 없었다. 그래서 누가 최초에 그 등기물을 받았는가를 추적하니 ‘나’라는 것이다. 내가 그 신용카드를 무단히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려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카드를 가져간 적 없으니, 사용하지도 않은 석달치 카드값을 절대 물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평소 우리 학교에서 우편물을 관리하는 대로 처신했기 때문에 절차상의 잘못은 없었다. 다만 그 카드를 사용했을 개연성이 높은 사람으로 은행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세상에 어느 어리석은 사람이 도장을 찍고 남의 등기물을 받은 후 그 카드를 사용하겠는가. 물론 학교에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문의하니 이것은 학교와 은행 사이의 문제라고 한다. 재판까지 간다 해도 승률은 반반이라고. 

 다행히 은행에서 자체 처리했는지 저 내용증명은 6개월마다 한 번씩 몇 번 더 온 후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내용증명이 올 때마다 그날 밤에 나는 잠을 설쳤다. 도장은 함부로 찍을 일이 아니다.   

                       

 32. 배철수의 크리스마스카드     

 그 겨울에 행복한 일도 있었다. 배철수로부터 크리스마스카드가 온 것이다. 배철수는 지금도 TV에서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명한 MC이자 가수다. 

 ‘웬일인가? 내가 배철수를 알지언정 배철수가 나를 어찌 안다고? 게다가 크리스마스카드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카드를 열어보았다. 학부형이었다. 내 마음은 더 행복해졌다. 담임 역할을 잘한 것도 아니었는데, 담임에게 감사하다고 우리 반 연희의 아버님이 보내온 카드였다. 

학생들에게는 종종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았었고, 학부모님에게 상담 편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카드를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생활기록부도 들여다보고, 가정환경조사서도 제출받지만, 학부모의 이름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고 불러주어야 할 학생들이 수백 명인데 어떻게 학부모 이름까지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연희가 모범생이었다 해도, 아버님 이름이 특별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철수’라는 이름은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강아지와 영희와 함께 등장하던 국민 대표 이름이다. 국민 대표 이름이다 보니 오히려 실제 자신의 이름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수업 중에 또는 아무개의 이름을 임시로 써야 할 때 ‘철수’는 ‘홍길동’처럼 자주 사용되는 이름이다. 나도 몇 달 전에 수업하면서 이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편지 봉투에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을 기록하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부모님 이름을 써야 할 부분에 ‘무어라 예를 들어 써 볼까.’ 잠깐 생각하다가 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보내는 사람을 배연희, 받는 사람을 ‘배철수’로 칠판에 적었다. 국민 대표 이름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는데 왜 그런지 그때는 몰랐었다.     


 지금도 그날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를 떠올리면 재미있다. 솜사탕 같은 행복이 피어오른다.                                                                  

 33. 어물전     

 새로 전학 온 진우는 얼굴빛이 유난히 희었다. 

 이상하게 전학을 온 학생은 얼굴빛이 좀 다르다. 더 희거나 더 검다. 물론 타고난 살빛이 다 다른 법이지만 살던 곳의 바람이나 햇빛, 온도도 조금은 다르고 사는 방식도 약간은 다르기 때문일까. 그래서 교실에 다함께 앉아 있으면 좀 도드라진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몇 달 섞여 지내면 그 도드라짐이 사라지고 은은하게 스며든다. 교실에 있는 60여 명 학생의 얼굴빛은 제각기 다른 법인데, 조금씩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수묵화의 번짐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진우는 서울의 8학군이라는, 학부모 특히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지역에서 전학을 왔다. 아버지는 의사이시다. 그런데 진우는 도통 공부에 관심이 없다. 아마도 그래서 좀 마음 편히 지내라고 그 교육열이 치열하다는 지역을 살짝 피해서 전학을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진우는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조용히 아이들과 섞여 학교생활을 원만히 하였다. 어느새 살빛도 비슷해졌다. 다행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났을까. 정확히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집 근처에 미도파 백화점이 있어, 남편과 함께 지하 식료품점에 장을 보러 갔다. 어물전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오징어 두 마리를 골랐다. 손질해 달라고 뒤에 서 있는 총각에게 내밀었더니 ‘어라, 진우였다.’ 옛날 성품 그대로 조용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게다. 아직 어물전 주인이 될 나이는 아닌데 싶어,

- 어! 진우 아니냐? 여기서 뭐하고 있니?

-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수줍은 얼굴로 오징어 한 마리를 덤으로 담아준다.     

 오징어 두 마리 값으로 세 마리를 가져오며 우리는 무척 흐뭇해 하였다. 진우가 옛날 담임에 대한 애정을 오징어 한 마리로 표현한 것 같아서 행복하기까지 하였다. 사랑받으면 행복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좀 걱정도 하였다. ‘저 오징어, 진우 것이 아니라 어물전 주인 것일 텐데 이렇게 인심 써도 괜찮을까?’                                                             

 34. 참새 방앗간     

 사정이 생겨 인천 친정에서 서울 북쪽 끝 창동으로 한 달간 출근을 하게 되었다. 어둑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1호선 전철을 타고 가다가 동대문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창동역까지 온다. 단지 한 달만 하면 되니까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가면 또 어둑어둑해진다.

 그날도 퇴근하자마자 앞만 보며 열심히 창동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자전거 페달을 급히 밟으며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자전거 뒤에는 배달용 철가방도 실려 있는데 왜 나를 향해 저렇게 달려오는 것일까.

- 아! 너 김은우구나.

 자전거가 내 앞에 멈추자마자 나는 그 애를 알아보았다. 첫 학교에서 만났으니 13년 전이고 그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보자마자 기억의 심연에서 이름이 불쑥 떠올랐다. 제법 어른의 모습이다. 멀리서 나를 알아보았다니 눈썰미도 좋다. 이름이 떠올라서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이렇게 길에서 보다니, 참 반가웠다. 첫 학교는 남부교육청 소속이고 여기는 북쪽인데,   

  

-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참 오랜만에 뵙네요.

- 은우야, 반갑구나. 그런데 어디 가는 중?

- 저 <참새 방앗간> 주인이에요. 배달도 하고요. 지금 비  빔국수 배달 중인데 선생님을 멀리서 보고 달려왔어요.

- 잘했네. 결혼도 했고? 아이는?

- 네, 몇 달 뒤에 아내가 아이를 낳아요. 아버지가 되는 거지요.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은우는 비빔국수를 배달 중인데 불어터지면 안 되니까 가던 길을 속히 가야 했다. <참새 방앗간> 주인이라니 기쁘다. 아르바이트나 점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버젓이 가게를 차렸다니 뭔가 안심이 되면서 새록새록 기쁘다. 

 <참새 방앗간>은 김밥도 팔고 비빔국수도 파는 소박한 분식집이다. 우리 가족도, 물론 은우네 <참새 방앗간>은 아니고 우리 집 근처의 <참새 방앗간>에 가끔 김밥이나 비빔국수를 먹으러 갔었다.                                                            

 35. 그리운 연주     

 그해에 나는 담임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3학년 담임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작은아이를 돌보시던 도우미 할머니가 갑자기 그만두시고, 아이는 유치원 종일반에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이 5살, 유치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 등원해야 해서, 엄마인 나도 우리 반 아이들 아침 자습시간에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 사정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교감 선생님께 담임 배정에서 제외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도, 3학년 여학생반 담임이 되었다. 3학년 담임이면서 아침 자습시간에 들어가 정숙히 공부하도록 지도를 할 수 없으니, 3,4월은 스트레스가 참 많았다. 그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5월에는 마음을 바꾸었다. ‘스트레스받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가 일찍 못 가는 날은 연주가 잘하고 있겠지, 그냥 올해는 이렇게 지내야겠다.’ 

 거짓말처럼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얼굴과 마음을 두껍게 하고 그해를 보냈다.

 우리 반 반장 연주가 수고를 많이 하였다. 그래서 오래도록 연주를 잊지 못한다. 참 반장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반장은 담임과 학생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내가 감사해야 할 일도 많았구나.     

 가을 체육대회 날이었다. 하필 그날은 서울대학교 부속 아동병원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우리 아이도 종일반에 다니는 것이 스트레스였는지 2학기가 되자 병이 났다. 지금은 지나간 한때의 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퍽 마음 졸이며 살았었다. 

 그 병원은 종로 5가에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 꽤 멀다. 하루 결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체육대회인데 우리 반 아이들이 담임도 없이 의기소침해 있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는데, 다음 날 우리 반이 ‘응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연주와 아이들이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졸업을 하고 어느 해 연주가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님이 인생은 양파 같은 거다 하셨는데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노라고.’ 나는 그 말을 했었는지 어쨌는지 잊었지만, 맞는 말이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 열심히 살라는 말인데, 연주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36. 수정이의 속 깊은 마음


 우리 반 수정이는 늘 침착하고 조용하게 행동한다. 얼굴빛도 밝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 그런대로 성적도 우수한 편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러나 알고 보면 마음에 구멍이 하나 뚫린 아이였다. 수정이가 서너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둘다 수정이를 ‘나 몰라라’ 팽개치고 각자 제 갈 길을 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부모를 만난다든가 하는 일도 없는 듯했다. 

 가엾은 수정이를 큰이모가 거두어 길렀다. 이모댁에는 수정이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또 나이가 적은 동생도 있었다. 이모의 큰 아량과 사랑 속에서 그만큼 자랐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모네 살림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아도 아끼면서 검소하게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정도였다.     


 수정이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고집한다. 3학년이 되면, 학기 초에 한번 서면으로 진학에 관한 희망사항을 부모 및 보호자로부터 받는다. 부모의 희망과 학생의 희망이 일치할 때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고등학교는 크게 인문계와 비인문계로 나눌 수 있다. 인문계에는 일반인문계, 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민족사관고등학교 등이 있고, 비인문계에는 상업고등학교, 공업고등학교, 그밖에 요리고등학교, 애니메이션고등학교, 디자인고등학교 등의 특수학교도 있다. 

 지금은 상업계, 공업계 고등학교가 마이스터고라든가 디지털고등학교라든가 명칭이 많이 바뀌어서, 이미 여러 해 전에 학교를 떠난 나로서는 이제는 그 종류와 교육과정들을 자세히 구분하지 못한다.     


 수정이는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다 하였으나, 이모와 이모부는 인문계 고등학고 진학 희망란에 도장을 찍어 보내셨다. 일단은 서면으로 1차 조사서를 받은 후, 수정이처럼 보호자와 생각이 다른 몇몇 학생들과만 진학상담을 하게 된다. 우선 무엇 때문에 부모님과 다른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정이 생각에는 그동안 이모에게 입은 은혜가 크고, 이모네도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닌 데다가, 이모네 친자식도 셋이나 되니, 자기가 인문계 진학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인문계로 진학한다는 것은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고 이모에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조금이라도 드리고 싶단다. 공부를 더 해야 할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겠다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뒤에 나는 우리 집 다락방에서 《현대문학》 수십 권을 발견하였다. 계간 문학 잡지였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구독하셨던 것을 둘 데가 없으니 컴컴한 다락방에 쌓아두셨나 보다. 기거할 수는 없는, 창고와 같은 어두운 다락방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거길 올라가 보게 되었다. 호기심이었다. 

 초등학교 때 만화책과 동화책을 무척 좋아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니 더 이상 읽을거리가 없어 다락방이라도 뒤져보았다. 나중에는 학교도서관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매일매일 《현대문학》을 꺼내다가 시와 소설을 읽었다. 가난하여 남의 감자밭에 가서 감자를 훔치다 몸을 팔게 되는 김동인의 <감자>라든가,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속절없이 아내가 죽어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소설 속에서 아녀자들은 불행한 삶을 견디고 있었다.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폭언을 하고, 폭력을 가해도 참고 견디고, 많은 남자들이 첩을 두거나 바람을 피워도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졌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 이후 나는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자는 직업을 가질 게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을 잘 가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경제적인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경제적인 독립을 하고자 하는 수정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다. 수정이의 이모님께 전화를 하여 진학상담을 하였다. 이모는 여전히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원하셨다. 학교로 내방하시기를 청하여 진솔하게 여러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수정이 이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며, 이모 슬하에 둔 자식 이야기며 등등.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닌 이모님 입장에서는 수정이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나 사람들 이목이 신경 쓰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모님이 정확하게 마음을 표현하신 것은 아니다. 나의 짐작이다. 이모님에게 명분을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수정이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고 끈기 있게 설득하고 권하였다.   

   

 수정이는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이모님의 은혜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아는 아이였으니, 제 앞가림을 하면서 잘살고 있을 것이다. 솜털처럼 부드럽고 봄볕처럼 따뜻한 사람도 만나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뚫어져 있던 구멍도 메우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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