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번째 책, 허먼 멜빌 『모비딕』
박대표도 회사원이었다. 자기가 한 일은 100인데 돌아오는 몫은 1이라고 생각해 그만두었다. 도대체 내가 만든 99는 누가 가져갔을까? 내가 회사를 차리면 나머지 99도 내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온다고 철석같이 믿고 자영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대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다. 노트와 필기구를 팔았다. 복사도 하고, 한쪽엔 스낵과 음료도 갖다 놓았다. 나름 종합마트 분위기를 풍겼다. 장사는 잘되지 않았다. 요즘 대학생들은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공부하고, 필기내용이나 시험 족보는 파일로 주고받는다.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박대표처럼 사회 경험이 절대 부족한 친구가 권리금까지 주면서 가게를 인수해 갔다. 횡재였다.
박대표는 대학교 정문 쪽으로 자리를 옮겨 치킨집을 열었다. 받은 권리금에 대출까지 보탰다. ‘치킨이 땡기는 날’이란 간판을 걸었다. 박대표가 직접 작명했다. 간판 때문이었을까? 학생들이 이 집 앞에만 오면 이상하게 치킨이 땡긴다며 매일 왔다. 개강파티, 종강파티, 중간 기말고사 끝나는 날엔 예약만으로도 홀이 꽉 찼다. 한일전 축구, 올림픽, 월드컵,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등 빅매치가 있는 날엔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손님이 더 많았다. 친한 단골 학생들이 도와준 덕분에 가게 일손도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정말 잘했다, 나머지 99가 이렇게 고스란히 들어오는구나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의 기세는 대단했다. 가물에 콩나듯 나오는 정부 보조금으로는 가게 월세도 낼 수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6개월이 넘자 박대표는 초조해졌다. 재빨리 다른 사업으로 바꿔 타야겠다고 생각한 박대표 귀에 코인에 투자한 주변 사장님들의 대박 소문이 들렸다. 대박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떤 투자회사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 투자회사는 국내 대기업의 모바일 상품권, 해외 유전 등 다양한 곳에 투자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가보니 세계 지도와 각국의 현재 시각을 알려주는 금장 시계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딱 봐도 성공한 글로벌 투자회사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암호화폐였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를 비웃듯 200% 이상의 수익률을 가리키는 붉은 화살표가 사람들의 마음을 천국까지 끌어 올렸다. 박대표는 친척, 친구, 과거 회사 동료들의 돈까지 모두 끌어 모아, 그곳에 투자했다. 영혼은 진작에 갈아 넣었다. 코로나가 준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존경하던 투자회사의 대표님을 악당으로 부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달은 약속했던 수익금이 꼬박꼬박 들어왔다. 고맙고 감사했다. 3개월 후 부터 준다 준다 말만 하고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통화하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어 급한 마음에 사무실로 찾아가기도 했다. 박대표는 자기 몫은 그만두더라도 지인들에게는 수익금을 줘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속이 타 들어갔다. 지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 빚을 지고 있었다. 악당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박대표가 자신과 동업한 사이라며 헛소문을 퍼트려 투자자들을 이간질했다. 박대표는 이리저리 난처한 상황으로 몰렸다. 투자자들 사이에선 자본금까지 모두 까먹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급기야 악당은 잠적했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는 것은 물론,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 있게 받던 전화도 이젠 받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경찰은 이런 경우 아무 힘도 못 쓰니 차라리 조폭을 불러 해결하자’, ‘등기부를 확인했더니 사무실도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더라’, ‘사기 전과 7범이라더라’ 등등 고성과 억측이 오고 갔다.
박대표는 자신을 믿고 돈을 빌려준 지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밥알이 모래알 같았다. 65kg이었던 몸무게는 49kg이 되었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다. 주변 사람들은 박대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노심초사했다. 결국 박대표는 결심했다.
전 재산을 털어 피해를 보상했다. 턱없이 부족했지만 지인들도 어쩔 수 없지 않냐며 타협했다. 학창시절 단짝이었던 친구가 지금 당장 태국으로 오라고 했다. 무조건 주변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도 했다. 단짝 친구도 사업에 망해 태국으로 떠난 지 4년이 지났다. 박대표는 산 송장처럼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 말이 아니더라도 한국엔 단 하루도 더 있기 싫었다. 맥이 풀릴 때로 풀린 그의 손엔 『모비딕』이 들려 있었다.
『모비 딕』? 박대표는 이 책이 왜 자기 손에 들려 있는지 몰랐다. 더듬어 생각해 보니 급하게 고시원을 나오면서 비행기에서 읽을 가장 두꺼운 책을 집었던 것 같다. 악당을 잡으려고 집까지 팔고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박대표였다. 이 상황에 책이라니 좀 한심했다. 지금 보니 책 표지가 섬뜩하다. 기분 나쁘게 생긴 괴물의 눈 주변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고, 그 눈동자는 얼마나 크고 튼튼한지 날카로운 작살을 장난감처럼 튕겨내고 있었다. 튕겨져 나간 작살들 사이로 포경선 선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언뜻 봐도 이놈이 모비딕인 걸 알 수 있었다. ‘모비딕이라,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박대표는 책 제목을 제대로 풀이한다면 전체 이야기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희한한 이름이다. 모비-딕의 ‘모비’는 ‘거대한’이라는 의미였다. ‘딕’은 ‘남자의 성기’를 뜻한단다. 그렇다면 모비-딕은 거대한 남자의 성기란 의미인데, 말초신경 자극하는 삼류 음란물도 아니고, 이런 제목을 단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모비-딕은 향유고래고 향유고래 전체 모습은 남자의 성기와 닮았다. 그게 전부일까? 향유고래는 크고 빠르면서 사납기로 유명하다. 포경선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워낙 힘이 세고 빨라서 포경선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많다.
드넓은 바다, 검푸른 심연에서 튀어나와 거대한 물보라를 만들면서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향유고래. 그 고래를 잡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선원들. 이 둘의 싸움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이다. 도대체 선원들은 왜 이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 것일까? 사람이 바다에서 향유고래를 맞상대하는 것이 과연 안전한 생계 수단이란 말인가?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고래잡이 말고도 덜 위험한 직업이 얼마든지 있다. 박대표는 선원들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모비-딕은 덜렁 고래의 이름만은 아닐 것 같았다.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넓디넓은 바다. 그 안에 내가 잡아야만 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그 무언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안다고 해도 그것은 엄청난 힘과 뛰어난 머리를 가졌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모비-딕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박대표는 일단 여기까지 생각하고 첫 문장을 읽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 달라.(Call me Ishmael)
『모비딕』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마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박대표는 금방 이 이름의 의미를 낚아챘다.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떠받치는 아브라함에겐 아들이 둘 있다. 하나는 이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녀로부터 얻은 아들이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믿음의 조상을 친아버지로 두었으나, 믿음의 조상이 품은 의심 때문에 태어난 인물인 것이다. 이스마엘의 혈관엔 ‘믿음’의 피와 ‘의심’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스마엘이 『모비딕』을 이끌어가는 이야기꾼이다. 박대표는 피식 웃었다. ‘그럼, 이 사람 말을 믿어야 하는 거야, 의심해야 하는 거야?’ 믿음의 조상이 하나님을 의심해서 낳은 아들. 그렇다면 그 아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란 의미. 하나님의 선택은 이삭이었다. 인간 아브라함이 선택한 결과인 이스마엘. 박대표는 순간, 이제 이야기를 시작한 이스마엘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인 이삭의 말을 기다려야 할지 주저했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박대표를 깊은 바다로 끌고 들어갔다.
이스마엘은 식인종 야만인인 ‘퀴퀘그’와 함께 고래잡이배에 오른다. 이스마엘은 퀴퀘그를 통해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점차 깨닫는다. 기독교와 서양문명은 자신을 교양인으로, 퀴퀘크를 야만인으로 갈라 맞세웠다. 나아가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퀴퀘그를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고 있었다. 이스마엘, 그 자신도 전통 기독교인들이 볼 땐, 죄의 산물인 주제에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마엘은 퀴퀘크의 자유로운 정신과 용기에 크게 매료된다.
이들이 함께 승선한 포경선의 이름은 ‘피쿼드’이다. 피쿼드는 백인에게 처음으로 전멸당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바다에서 선원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배 이름으로는 불길하기 짝이 없다.몇 백 년 동안 평화롭게 살던 어느 날, 피쿼드로 불리던 그들은, 난생 처음 본 백인들에게 잔혹하게 죽어갔다. 피쿼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여자와 아이들까지 전부 죽임을 당했다. 피쿼드는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피커드호는 산 자의 배가 아니라 죽은 자들의 배가 아닐까, 박대표는 생각했다. 그가 보기엔 피커드호는 바다에 떠 있는 공동묘지 같았다. 이것은 그들의 운명이 앞으로 어떠할지를 보여주는 암시가 아닐까.
이쯤 읽고 나니, 박대표는 『모비딕』이란 책제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스마엘, 퀴퀘크, 피쿼드는 기독교, 서양문명, 백인이라는 기득권에 의해 무시되거나 죽임을 당한 이름들이다. 기독교, 서양문명, 백인이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모두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을까? 아니다! 반드시 남자여야만 했다. 인류 역사에서 아무 근거 없이 막대한 기득권을 누린 자들은 바로 백인 남성이었다. 남근은 다른 이유 없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해택을 누려온 집단의 상징아니가! 그렇다면 거대한 남근, 모비-딕은 그동안 인간들이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해왔던 거짓 권위의 삼위일체인 기독교, 남성, 백인을 한꺼번에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박대표는 책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자신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존경해왔던 힘, 자신 또한 갖고 싶어 안달복달했던 그 힘을 조심스럽게 추적해 봤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자본주의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힘. 그 누구든 잡아먹을 수 있는 힘. 그러나 갖고 싶다고 아무나 가질 순 없는 힘. 그것을 잡으려면 목숨도 아끼지 않아야 하는 힘.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돈의 힘을 삶의 목표로 갖게 되었을까? 그건 혹시 헛된 그림자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림자를 쫓다가 나 역시 그림자로 변한 건 아닐까?
우연히 펼쳐진 곳에는 누군가 밑줄 친 부분이 있었다.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인지도 몰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흐린 물을 가장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에이해브. 그는 모비딕을 잡는 피쿼드호의 선장이다. 박대표는 이제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에이해브는 성경에 등장하는 악한 왕, ‘아합’을 영어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아합이라고? 아합은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우상을 숭배한 나쁜 왕인데? 모비딕이 잘못된 기득권의 상징이라면 그걸 잡고자 목숨을 건 선장은 훌륭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훌륭한 사람의 이름이 왜 아합이지?’ 박대표는 다시 한번 이름 속으로 생각의 바늘을 던졌다. 바늘 끝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걸려 올라왔다.
어쩌면 작가는 인물들의 이름을 상식과는 정반대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짓된 기득권들이 믿고 있는 뒷배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그러나 실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은 없다고, 거짓이라고, 우리가 속은 거라고 외치는 사람은 용기 있는 진리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진리의 메신저도, 신은 있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악마와 다름없다. 기득권의 홍보용 멘트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상을 용기 있게 밝히는 자들은 아합과 같은 악인일 뿐이다.
박대표는 이런 아이디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랬다. 그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변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에 갇혀 살다가 바깥세상의 실상을 본 그 사람의 비극적 최후가 무겁게 다가왔다. 동굴 밖에서 진짜 세상을 봤던 그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동굴로 돌아온다. 그러나 평생 동굴에서만 살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을 리 없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자신들이 쌓아올린 것들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기에, 그들은 지금 진실의 입을 막기에 급급하다. 이제 동굴 안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진실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지금 자신들의 믿음을 현실로서 지탱해내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내가 참이라고 믿는다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신념을 지킬 수만 있다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쯤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이다. 나의 믿음을 흔드는 자, 그의 이름은 악인이다.
섬뜩할 만큼 무서운 이 바다가 푸른 초목이 무성한 육지를 둘러싸고 있듯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찬 외딴 섬 타히티가 있고, 더구나 그 섬은 절반밖에 알려지지 않은 삶의 공포로 둘러싸여 있다. 신이 그대를 지켜주시기를! 절대로 그 섬에서 떠나지 말라! 일단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테니!
누구나 ‘나는 여기 확실히 존재한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환상의 섬에서 평화와 기쁨으로 살길 원한다. 그러나 에이해브처럼 자기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공포를 준 무언가와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 에이해브는 모비딕과 만난 첫 번째 싸움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자기 다리를 고래 배 속에 남겨둔 채, 에이해브는 비참하게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그는 불같은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모비딕이 바다 속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이를 덜덜 떨었다.
그러나 에이해브는 거짓된 환상의 섬을 떠나기로 스스로 결단했다. 삶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언가를, 복수의 대상이자 공포의 원인을, 꼭 자기 손으로 잡고자 다시 떠난 것이다. 그것을 죽이기 전까지 나는 나일 수 없는 것이다. 나를 그림자로 만들고 있는 거짓 빛의 정체를 향해 그는 자신만의 작살을 반드시 던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잡기 위해 거의 미쳐 있다. 그의 광기는 향유고래를 잡아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적을 훌쩍 뛰어넘는다.
흰고래에게 모든 악의 근원을 돌려,
미친 듯이 날뛰며 불구의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에 덤벼들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
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
흰 고래는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그들의 무의식적인 인식 속에서 흰 고래는 인생의 바다를 헤엄치는
거대한 악마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속고 있는 자들의 눈에는 거룩한 흰 고래를 죽이려는 에이해브가 악인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당당한 악인의 눈엔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선한 얼굴의, 천사같이 하얀 색깔의 고래가 악마처럼 보인다. 에이해브는 자신을 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남들처럼 편히 살다 죽으면 되는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살겠는가.
에이해브의 몸은 의족 때문에 비틀거렸지만, 그의 영혼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만의 작살을 갈고 또 갈았다. 그에게 안락한 삶과 목숨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진정한 본질을 끝내 지키고 싶었다. 기존 세상과 맞선 악인은 실상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흰 고래도 인간도 악마도 이 늙은 에이해브의 진정한 본질,
가까이하기 어려운 그 본질은 건드릴 수 없어.
박대표는 에이해브가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향유고래를 쫓아 태평양을 샅샅이 돌아다닌 에이해브와 돈을 쫓아 자본주의의 바다를 훑고 다녔던 자신이 다를 바가 없어 보인 것이다.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나서 복수의 광기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과, 돈에 치이고 사람에게 속아 삶의 의미와 열정을 잃어버린 자신은 다를 바가 없었다. 돈과 사람 핑계를 댔지만, 진짜 자신을 물어뜯은 건 자신의 욕망이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이 천국으로 바뀔 거라 믿고 쉼 없이 달려왔는데, 돌아온 건 상처와 죄책감 그리고 허무였다.
박대표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뭘까,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안락하고 무난한 생활을 포기하더라도, 그러다가 목숨을 잃더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삶의 가치와 의미가 나에게 있는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내가 끝끝내 찾아내고, 이겨내야만 하는 모비딕은 과연 무엇인가? 모비딕을 찾아 나는 다시 인생의 거친 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공항에 나온 친구는 박대표를 보자마자 꼭 안아주었다. 박대표에게 ”마이뺀라이“(ไม่เป็นไร)를 계속 말해주었다. 마이뺀라이는 ‘괜찮다’라는 뜻의 태국말이다. 큰일을 당한 사람에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 낙천적이고 여유 넘치는 태국인들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태국에 온 지 15년이 흘렀다. 이런 저런 일을 했다.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가 파도처럼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마이뺀라이를 읊조렸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가족의 사랑이 박대표의 마음을 키우고 꾸몄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싸워 이겨내야 할 것도 발견했다. 깨달음의 과정엔 이스마엘의 깨달음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나의 이 상황이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의 처지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샴쌍둥이처럼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이다.
박대표는 권리금을 받고 문방구를 팔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횡재라 여기면서 속으로 ‘앗싸!’를 수도 없이 외쳤던 자기 모습도 같이 끌려 올라왔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모두 샴쌍둥이처럼 결합되어 있을 뿐인데, 나는 달랑 내 지갑만 챙기면서 살았다. 투자회사 대표와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을 뿐인데, 그도 자기 잇속만 생각하고 나를 지탱해주던 밧줄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지금 태국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중요한 건 나는 밧줄의 한쪽 끝만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대표는 자신이 붙들고 있는 한쪽 밧줄을 꽉 잡는다. 내가 밧줄을 놓으면 누군가는 죽음의 바다 속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밧줄의 다른 한쪽은 그들의 몫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진정한 본질을 걸고 줄을 든든하게 당겨 줄 거라 믿는다.
박대표는 얼마 전, 예비 작가들을 위한 자기만의 방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글은 각자의 본질로 반짝이는 별과 같았다. 그 별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가리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공유 서재와 작지만 알찬 개인 집필실을 마련한 후, 박대표 역시 자신만의 글을 쓴다. 그의 글은 검은 바다를 헤엄쳐 나가, 하얀 고래와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