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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Oct 08. 2021

그거 고졸들이나 하는 일이잖아요

- 9번째 책,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왜 내가 해야 하죠!”     


회사 최초 여성 유학파. 그것도 미국 하버드대 MBA. 그녀는 울고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깨물린 눈물들은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기필코 터져 나올 기세다. 매섭게 쥔 작은 두 주먹만이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중심을 간신히 잡아주고 있었다. 죽은 눈물로 목을 축이자 정신 차린 이성이 날카롭게 눈을 떴다. 이제 따질 차례다.     

 

“인턴 3개월이야 회사 업무를 전반적으로 알아야 하니까, 백번 양보해서 제가 했어요. 하지만 이젠 저도 정식 직원입니다. 엄연히 제 담당 업무가 있고요. 사실 신문 배달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동안 쭉 고졸 직원들이 했던 거고요. 그런데 유학까지 다녀온 제가, 경영학 석사인 제가 단지 여자 직원 중 입사가 제일 늦다는 이유로 이 일을 전담하라는 게 말이 되나요? 그 시간에 좀 더 전문적인 일을 하는 것이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 아닌가요? 능력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나요? 왜 내가 그런 잡무를 해야 하죠? 제가 고졸인가요?”      


마지막 말이 김과장의 심장을 쥐어짰다. 김과장은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최고 명문 여상이었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 엄마를 생각하면 고등학교 졸업도 감지덕지. 대학의 ‘대’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학교 선배들은 어렵지 않게 은행에 취업했다. 김과장은 은행보다 오래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을 택했다. 월급도 복지도 좋은 편에 속했다. 문제는 학력에 따라 차별을 두는 보수규정과 조직문화였다. 고졸직원이라는 꼬리표는 입사 18년이 지난 지금도 따라 다닌다.     


이제 자신처럼 여상을 졸업한 신입직원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갈수록 대졸 직원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보수와 진급에서 대졸 직원들에게 자꾸 뒤졌다. 대졸 남자직원보다 덜 받고 늦게 승진하는 건 군대생활을 경력기간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 간신히 달랬다. 그것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았지만 꾹 참았다. 다 좋다. 그렇다면 자기보다 입사가 늦은 대졸 여자 후배들보다 보수가 적은 건 무엇 때문인가? 입사 18년 동안 김과장은 누구보다 성실히 일해오지 않았던가? 아파도 꾹 참고 죽어도 회사에서 죽겠다며 출근했다. 게다가 성과평가도 좋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문 파동이 난 이후 어느 날, 총무팀장이 김과장을 조용히 불렀다. 임원실 신문 배달을 대신해 줄 수 없냐는 것이 요지였다. 김과장은 어이가 없었다. 여자 후배들이 퇴사할 때마다, 자신이 다시 맡아야 했던 일은 신문 배달뿐이 아니었다. 책상 청소, 다류대 정리, 화분 관리 등 그동안 소위 막내가 해왔던 사소한 일들이 뚝 하면 김과장에게 떨어졌다.           



학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 오랜 시간 혼자 끙끙대며 앓던 답을 총무팀장에게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졸직원이 이제 김과장 한명이야.” 이제 고졸 직원은 나 하나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조직이 알아줄 거라 믿고 묵묵히 일만 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조직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회사생활을 마치게 될지. 단지 내 뒤에서 쉬쉬 하고 있었을 뿐이다.      


김과장은 서러웠다. 해외 MBA 출신의 분노에 찬 눈빛이 머리에 가득 찼다. 자신은 표현하지 못한 부당함을 그녀는 온몸으로 드러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부당함! 불공정! 그것이라면 김과장도 지금껏 뼈아프게 느껴온 바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동안 어떻게 이런 차별과 부당함을 참을 수 있었을까? ‘사회라는 게 원래 그렇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지금이라도 대학에 가면 되지 않냐’ 등등 자동차 경적 같은 목소리들이 빵빵거렸다. 그 목소리들이 의미하는 한결같은 주장은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공평한 교육 기회를 주고 있다’, 따라서 ‘학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학력을 갖춘 사람들은 그에 맞는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그 경쟁에서 뒤진 나는 그들의 권리만큼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이제라도 그걸 만회하라. 게임은 공정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는 영원히 계속될 기세였다.     

 

김과장이 머리를 흔들며 애써 이 목소리들과 싸우고 있을 때, 문자메시지 진동이 울렸다. 이번 달 학원 수강료가 결제되었다는 내용이다. 김과장은 잊었던 열정에 몸이 뜨거워졌다. 내 딸만은 꼭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이왕이면 명문대에 보내야겠다고, 유학도 보내야겠다고, 적어도 내 딸만은 고졸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내가 힘껏 돕겠다고. 김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여 마셨다. 이미 숱하게 마셨던 이 치열하고 뜨거운 공기를 마치 처음 맛보는 것처럼 지극히 눈을 감고 음미했다.     


능력주의! 김과장 역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것에 대해선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런 취급을 받는 현실이 못마땅할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딸만은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길 바랐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학원비를 가장 먼저 결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과장 자신도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다. 그동안 해왔던 자기개발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대학은 나오지 못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딸에게만큼은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김과장은 마음 바닥에 깔린 의욕을 긁어모았다. 모처럼 책을 한 권 사야겠다고 느낀 김과장은 온라인 서점 앱을 눌렀다. 휴대폰을 잽싸게 밀어 올리던 시선이 이상한 제목의 책에 막혔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목에 김과장은 몸을 일으켰다. 책 광고를 보던 김과장은 지은이가 마이클 샌델이고 그가 유명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쓴 하버드대 교수라는 걸 알았다. 그 잘난 하버드대 아니던가. 김과장은 이 책을 바로 주문했다.     


      

설마 몰랐어?     


우리 부모님이 요트부 감독에게 돈을 찔러줬어.
덕분에 난 스탠포드에 들어왔지.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까발리진 못할 것이다. 2019년 미국을 뒤흔든 명문대 부정입학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입시 부정 사실을 자녀들에게 비밀로 했다. 그들은 왜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잠깐만! 지금 이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내가 도둑놈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훔친 걸까?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
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공평한 사회는 꿈일 뿐이다. 현실은 공평하지 않다. 진짜 문제는 공평하지 못한 현실에 그만한 이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만한 이유란 도덕적인 이유, 즉 떳떳한 이유를 말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분노로 폭발하거나, 무기력으로 시들어 사회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능력주의는 여기에 떳떳한 명분을 준다.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니, 결과는 능력껏 가져가시라!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나의 뛰어난 능력뿐! 능력주의의 도덕적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훔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의로운 승리와 능력에 대한 도덕적 인정이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기부입학제도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기부입학은 그야말로 돈으로 산 것이니까, 정의로운 승리자 또는 도덕적 능력자로 자부할 수 없다. 부모의 돈은 자기 능력에 비해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하다.     


김과장은 여기까지 잘 이해됐다.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니, 결과물을 능력껏 가져가는 게 뭐가 나빠! 이 말은 대통령 선거 때 나부끼던 구호와도 비슷하지 않은가 잘못되었을 리 없다. 도대체 능력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건지 김과장은 좀체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재능과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리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 (…)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과장은 소파에 뉘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버드 MBA 신입직원이 자신을 밀어붙이던 분노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당당한 분노의 근거와 자신이 느꼈던 새빨간 모멸감의 이유를 방금 확인한 것이다. 능력주의에서 진 사람들을 깔보는 건 승리자만이 아니다. 실패자는 자기 자신도 깔본다. 능력주의에서 진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욕을 한다. 이 공정한 게임에서 진 건 다 내 책임이라고 자신을 모질게 닦달한다.  

    

김과장도 그랬다. 김과장은 지금 자신이 겪는 학력에 의한 차별을 어느 정도 당연히 여겼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자신이 고스란히 껴안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탓하지 않았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니 나라 탓도 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 믿었다. 좋은 날이 당최 오지 않자, 자기 딸만은 이런 세상에 살게 해선 안 되겠다 싶어 사교육에 열을 올렸다. 정 못 참겠다 싶으면, 김과장은 야간대학이나 방통대를 알아봤다. 일과 가정 두 가지 삶만으로도 저녁엔 죽을 지경이라, 약한 체력과 의지를 탓하며 대학의 꿈을 접곤 했다. 의지가 이렇게 약해 빠졌으니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싸다며 자책했다. 꿈을 포기할 때마다, 자책이 반복될 때마다, 딸에 대한 기대는 위험할 만큼 커졌다.     


그렇다면 능력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어떨까? 엄청난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놀랄 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 (중략) 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설문 이전 1년 이내에 자살을 고려했다. (중략)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책에 딸의 지친 얼굴이 인쇄돼 나타났다. 딸의 얼굴 뒤로 수많은 아이들의 핏기 없는 표정들이 쓰러져 있었다.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8년째 자살이라는 뉴스가 생각났다. 2020년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학생 10명 중 4명은 여가시간이 하루에 2시간도 안 된다고 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울감도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2016년 이후 사교육 시간은 꾸준히 증가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어릴 때 딸은 자연스럽게 친구 집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친구를 집에 데려오기도 했다.     

 

“너는 친구들하고 놀 거 다 놀고 언제 공부하니? 숙제는 하고 노는 거지? 뭐? 안 했다고? 너 엄마 말이 우습니? 이게 지금 몇 번째야? 엄마 미치는 거 보고 싶어?”     


이런 말도 안되는 꾸중을 들은 뒤, 딸은 혼자 다녔다. 그때 딸은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반실성한 사람처럼 울면서 딸에게 소리 지른 그 날은, 대졸 후배가 김과장보다 먼저 승진한 날이기도 했다.      


    

능력도 운빨이다     


김과장이 아직 여고생 티를 벗지 못했던 신입 시절, 교육팀에서 20년 넘게 일하신 한부장님은 이렇게 푸념했다. 자기 앞에 누가 있는지 알면서 하는 하소연인지, 아무도 없기에 하는 속 편한 혼잣말인지 모를 말이 그의 입에서 절뚝거리며 나왔다.      


“세상에서 젤 무서운 놈이 운빨 좋은 놈이야. 실력만 있어선 운 좋은 놈을 절대 이길 수 없어.”     


한부장님은 알고 있었다. 실력과 운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한부장님의 말씀에는 모종의 불만이 서려 있었다. 실력은 내 책임이지만, 운은 내 책임이 아니다, 따라서 내 책임이 아닌 운이 나에 대해 뭔가를 결정하는 건 옳지 못하다. 한부장님은 운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경계하거나 우려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마이클 샌델은 행운 덕분에 우리가 감사와 겸손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에 취한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결과라는 생각에 공동체나 신 또는 행운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치 원시인을 보듯 말한다. 공동체? 신?? 행운??? 에이~, 당신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계신가요? 그들은 자기 외에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능력에 손댈 수 없다고 과인 신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공동체 등에 대한 감사와 겸손함을 잃어버리고, 그 결과 오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DNA를 물려받은 건 그의 실력으로 이룬 성과일까? 우수한 DNA가 잘 자랄 수 있는 교육 환경에 그가 있었던 것은 그의 실력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공부하는 재능을 특히 우수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태어난 것은 그의 실력이 만든 결과일까? 축구나 노래 등 특별한 몇 가지 재능에 수 백억원이 몰리는 것은 단지 그의 실력 때문만일까? 이 모든 것이 적절하게 잘 맞아 돌아간 것은 정말 그의 실력일까?      


김과장은 자기 삶 전체를 돌아보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자기가 모든 걸 관리하고 책임진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님 덕분에 태어났다. 아플 땐 병원과 의사가 있었다. 학교엔 선생님과 교과서가 있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고, 외출할 땐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손쉽게 이용했다. 시장에는 많은 물건이 차고 넘쳤다. 이 모든 것들이 척척 잘 돌아가서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성장하고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김과장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내 실력으로 번 돈을 냈기 때문에 이것들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만한 뻔뻔함도 김과장에겐 없었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역시 운에 기초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임금이 결정되는 방식은 도덕적인 가치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일치라는 우연한 결과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임금이 능력에 따라 주어진 보상이기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결정되었을 거라 치부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받는 돈이 능력주의에 기초한 회사 규정을 근거로 산출된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받는 돈도 나름 합리적으로 결정되었으리라 믿고 더 이상 심도있는 논의를 하지 않는다. 가끔 누군가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다는 뉴스가 뜨면 자기 연봉과 비교하고 한없이 부러워할 뿐이다. 어떤 이유로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받게 되었는지, 그것이 정말 그의 능력만으로 거둔 성취인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은 자유시장경제의 대부격인 하이에크의 말을 인용해 경제적 보상과 도덕적 자격이 아무 상관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애당초 경제적 보상과 개인의 능력, 도덕적 자격은 전혀 무관하다고 봐야 한다. (…) 이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우연한 일치점에 따라 좌우된다. (…) 하이에크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러한 능력주의 신화가 부모와 학생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면서, 다음과 같은 2009년 11월 <타임>의 표지 기사를 소개한다.    

 

'과잉 부모 노릇의 폐해: 엄마 아빠는 왜 이제 잡고 있던 줄을 끊어야 하나.'
 기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라는 게 마치 어떤 생산물의 생산 과정처럼 되고 말았다.”     


‘부모 노릇이 마치 어떤 생산물의 생산 과정처럼 되고 말았다.’에서 김과장은 말문이 막혔다. 몰입해서 봤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생각났다. 김과장 자신도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뭐라 비난할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능력주의의 위력에 눌려 딸을 연봉 많이 받는 생산품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어지는 문장은 이것이 김과장 개인 문제에 그치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다.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 한국 같은 나라였다.       


   

그렇다면 한국 같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김과장은 회사 화장실에서 ‘지잡대’라는 말을 들었다. 신입직원들이 인사팀 누구누구를 가리키며 “지잡대 출신이야”로 말을 끝내는 걸 들은 것이다. 김과장은 급하게 검색해봤다. 지잡대의 뜻은 ‘지방에 있는 잡스러운 대학’이었다. 검색결과에는 이런 글들도 보였다. “저희 학교는 지잡대인가요?”, “수시반수해서 지잡대”, “지잡대 대학생 도와주세요.” 학력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인정하는 글들이었다.      


‘대학도 다 같은 대학이 아니구나. 대학도 지잡대가 있구나. 그러니 나같은 고졸은 저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김과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나쁜 이야기를 끊기 어려웠다. 그저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능력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신입직원들만이 아니었다. 김과장은 공공의대 설립에 대해 찬반 의견이 날카롭게 부딪히던 어느 날, 친구가 보낸 그림 한 장을 또렷이 기억해 냈다.   

                 


위 그림은 학교 성적과 의사로서의 역량이 정비례 한다는 전제가 깔린 그림이다. 놀라운 건, 이 그림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만든 홍보용이었다는 사실이다. 공공의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을 널리 알리면 국민들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믿은 모양이다. 이들은 능력주의에 취해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학교성적, 즉 우수한 시험결과와 같은 말로 쓰고 있었다. 시험에서 보다 많은 문제를 맞힌 사람은 어떤 직업을 갖던지 상관없이 그의 능력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객관적 증거가 된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앞으로 AI가 장착된 로봇이 가장 우수한 의사가 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로봇은 그 어떤 문제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김과장인 더 놀랐던 것은, 저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사람의 생명과 몸을 다루는 의사라는 점이었다. 김과장은 저런 생각을 가진 의사들은 정말이지 극소수이길 바랐다.      


대한민국엔 이런 뉴스도 있었다. 학력에 의한 차별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지금 논의 중인 차별금지법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을 다름 아닌 교육부가 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학력’은 ‘성’, ‘연령’, ‘국적’, ‘장애’ 등과 같이 통상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이유로 밝히면서, 아울러 학력은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상당 부분 성취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합리적 차별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법률안 검토의견서에 적어 냈다.      


교육부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플라톤이 『국가』에서 상상한 이상적인 국가가 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 국가에서는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을 모르고, 어떤 자식도 자기 부모를 모르는 상태에서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공교육이 실시된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 출신지역, 재산 등 학생을 판단하는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을 모두 없앤 것이다. 그 나라의 공교육은 음악, 체육, 시, 수학, 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실시된다. 물론 사교육은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런 공교육이 실시되고 있나? 교육부가 저런 주장을 하는 걸 보면 플라톤식 공교육이 우리나라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김과장은 비꼬았다. 하여튼 한국은 이런 나라다.      


    

일의 존엄성     


우리가 여러 다른 일들 사이에서 무엇을 더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한 재고가 있어야 한다. (…) 배관공이나 전기기술자, 치과위생사 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SAT 점수가 낮은 사람이나 아이비리그 대학에 갈 만한 재력이 없는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과정으로 여길 게 아니라 말이다.   

   

‘나는 어떤 일을 높이 평가해 왔을까?’ 김과장은 생각했다.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공동선에 기여하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돈 많이 주는 일이었을까. 여기에 답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공동선에 기여하는 중요한 일들에 대한 보상과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공동선에 기여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까, 김과장은 자존감이 떨어질 때로 떨어졌던 지난 여름 배웠던 귀한 삶의 의미가 생각났다.       


체감온도 40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 김과장은 음식물쓰레기를 내놓을 때마다 코를 틀어막고 오만상을 쓴다. 며칠 묵힌 음식물쓰레기는 썩은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진다. 한 손엔 쓰레기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코를 막는 자기 모습이 영 처량하다. 골목에 쌓인 쓰레기들이 회사에서의 자기 모습 같다. 썩은 물이 된 고등어는, 한 달 전 만 해도 동해 바다를 누볐을 생명이었다. 나 역시 꿈 많고 에너지 넘치는 생명이었다.      


사람이 사는 일 중 먹는 것이 8할이요, 그 먹는 것 중 8할은 다른 생명체의 몸이다. 김과장은 ‘내가 저들을 씹고 삼킬 자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렇게 잔뜩 쪼그라들 무렵, 은밀하지만 위대한 에너지가 골목에 등장했다. 이 에너지는 노란색이고 까딱까딱 소리를 낸다. 이윽고, 육중한 쓰레기통이 바퀴에 실려 골목을 누빈다. 음식물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아저씨가 도착한 것이다. 그의 날랜 발걸음은 우리가 사는 모양새를 그대로 빼다 박은 쓰레기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간다. 뚜벅뚜벅 다가가 번쩍 들어 올린다. 원래 두 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한 명이 한다. 운전대를 놓자마자 급히 내린 무심한 표정과 손놀림은 그래서 두 배 이상 무심하고 분주하다. 아저씨는 온몸으로 삶과 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삶은 원래 힘든 거라고, 우리가 특별히 뭘 잘못해서 힘든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살아내라고. 자책하기엔 삶이 너무 짧고 아름답다고. 이왕이면 내 삶이 누군가를 먹이고 살리는 삶이 되면 좋지 않겠냐고.‘  

    

김과장은 죽비로 등짝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차에 올랐다. 트럭은 좁은 골목을 10미터쯤 비집고 내려갔다. 아저씨의 일은 계속됐다. 가로등 아래 비친 그의 움직임이 마음 한가운데 걸작처럼 걸렸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가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일이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이며, 생계를 꾸리는 방법이자 동시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 불만과 증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더 큰 원인일지 모른다고 김과장은 생각했다.   

    

우리가 기여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우리가 받는 급여액으로 판단할 수 없다. 급여액은 (…) 수요와 공급의 우연적 상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기여분의 참된 가치는 우리 노력이 향하는 목표의 도덕적, 시민적 중요성에 달려 있다.     


김과장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노력이 향하고 있는 목표는 무엇이냐고. 그 목표는 도덕적, 시민적 중요성이 있는 것이냐고. 꿀 먹은 사람 마냥 침만 꼴깍 넘겼다. 평생 대학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 해 오신 엄마 얼굴이 떠오른 건 왜인지 몰랐다. 엄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을 청소하신다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강의실이 깨끗해야 학생들이 건강하고, 건강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더 건강하고 똑똑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냐며 특유의 입담을 발휘하시곤 했다. 엄마의 목표는 분명 도덕적, 시민적 중요성에 향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공부 잘했던 딸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선 잠시 말을 끊는 것으로 혹은 조용히 자리를 떠나시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렇게 불공평하고 참혹한 곳에서 어떻게 탈출하셨나요? 비결이 뭔가요?“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지옥 같은 곳에선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는 게 답이다. 그래서 우리는 멋지게 탈출한 사람들에게 탈옥의 성공 비결이 뭐냐고 앞 다투어 질문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답은 늘 공부였고, 좋은 대학이었다. 그러면 우린 받아 적은 비법을 우리 아이들에게 그대로 따라 하라고, 그럼 저 사람처럼 탈출할 수 있다고, 그러니 제발 엄마 말 믿고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했다. 학력 때문에 수모를 당한 날이면,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탈출해야만 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은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순 없다. 비록 있어 보이는 일도 아니고 받는 돈도 적지만,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그런 일들을 오늘도 묵묵히 해내고 계신 분들이 우리나라엔 너무나도 많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사회적 인정과 성공의 명예가 있다면 그분들께도 돌아가야 한다. 나아가 그분들이 사회적 공헌에 걸 맞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 그분들의 몫을 시장에게만 맡겨선 안 된다. 시장은 이미 권력과 편법 때문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서서 그만한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런 사회가 건강하고 똑똑한 사회다.     


김과장이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하기로 한 저녁을 내일로 미루자고 하신다. 같이 일하시던 아주머니께서 청소하시던 학교 건물에서 돌아가셨다며 우셨다. 이 더운 날,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건물을 혼자 청소하셨단다. 코로나가 생기면서 그 건물에서만 매일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6개 넘게 나왔단다. 엄마는 언젠가 당신이 청소하는 건물 이름이 영어로 뭐냐, 한자로는 어떻게 쓰냐고 어둡고 무겁게 물어보신 적이 있다. 돌아가신 분이 청소하시던 건물 이름도 함께.     


이 일은 뉴스에 연일 보도 되었다. 진실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언제나 그렇듯 뉴스에서 사라졌고, 이내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엄마는 몇 날 며칠을 앓아 누우셨다.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이 뭐 어쩌겠냐며 학교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이 잔뜩 서린 한숨을 내뱉으셨다. 일에 대한 자부심과 감사함은 사라졌다. 김과장은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약한 사람들은 늘 저렇게 뒤에서 한숨만 뱉었을 뿐이다. 저래서는 능력주의에 취한 사람들과 싸울 수 없다.      


다음 날, 김과장은 총무팀장을 찾아갔다. 그 누구의 일도 아닌 업무들을 나열했고, 그 업무를 자신이 얼마나 오래, 어떻게 해 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앞으로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해당 업무를 해야 할 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분명하게 밝혔다. 이와 함께 회사의 임금보상 규정에서 학력에 의한 차별내용을 삭제하도록 요청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하겠다며 살짝 떨리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전달했다. 총무팀장은 김과장의 의견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그는 다음 달 첫 주 월요일에 예정된 임원회의에서 김과장이 제기한 문제들을 제1 안건으로 다루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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