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해외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을 16년 만에 가보았습니다. 잠깐 머물던 교토에서 우연히 지도를 보는데, 투숙 중이던 호텔 부근에 귀무덤이라는 지명이 보였어요. 언젠가 들었던 조선인의 귀 무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확인해봐야겠다 생각했죠.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 속에서 몇 개의 신호등을 건너서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갔죠. 오래된 동네 안으로 들어가니, 드디어 귀 무덤이 나타났습니다. 낡고 수수한 모습에 서글픔이 느껴졌어요. 만약 화려한 모습이어도 기분이 상했겠지요.
귀 무덤은 일본 전역에 여러 개가 있다고 하는데, 교토의 있는 귀무덤이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조선인 이만 육천 명의 귀와 코를 소금에 절여와서 매장한 거라고 하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명에 따라 조성된 곳이라고 하는데, 하필 그 앞에 히데요시를 모신 도요쿠니 신사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에겐 슬프고 억울한 장소인데, 혹시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귀 무덤을 앞에 두고 관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귀 무덤 앞에 있는 안내문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간략하게 이곳을 소개하고 있었어요.
<귀 무덤(코 무덤)>
이 무덤은 16세기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한반도를 침공한 분로쿠 게이초의 역(한국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1592~1598년)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의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 무덤, 코 무덤)의 유래이다.
귀 무덤(코 무덤)은 사적 오도이 토성 등과 함께 교토에 현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유적 중의 하나이며 무덤 위에 세워진 오륜 석탑은 1643년에 그려진 그림 지도에도 이미 그 모습이 나타나 있어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의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 무덤(코 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에 대한 일화는 오사카성 천수각에서도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에 의해 세워졌다가 전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두 차례 개축되었다는 이곳에 들어갔을 때, 왠지 모를 공포감이 느껴졌습니다. 영화에서 보았던 왜적의 그림도 있고, 괴기스러운 옷을 입은 무사 모형도 전시되고 있었어요. 히데요시의 치적을 미화하여 늘어놓은 것 같아서시큰둥하게 지나쳤습니다. 그가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일본을 통일한 입지전적인 인물임은 분명 하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죄가 세월이 지났다고 용서될 수 있을까요.
통영 문화원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울거나 위험한 행동을 할 때, 어른들은 "애비!" 혹은 "이비야!"라는 말을 하죠. 이 단어의 의미가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아이에게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는 뜻이랍니다. 이 단어는 임진왜란 때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한자로 귀 이(耳) 자, 코 비(鼻) 자, 남자를 뜻하는 아비 야(爺) 자입니다. 왜군들은 죽은 사람은 물론 산 사람의 코도 베어 갔답니다.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갓난아기와 그 엄마의 코까지 베어갔다고 하고요. 임진왜란에 이어 재 침략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왔던 일본인 승려 경렴이 쓴 '조선일일기'라는 종군 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요토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그 당시 실력자인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결국엔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미천한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당대나 후대에 그에 대한 기록에는 왜곡된 표현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이런 미화가 꺼림칙했는지 오사카성 천수각의 도요토미 일화를 그린 그림 밑에는 "도요토미가 수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살해한 것은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라고 애매한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잘못한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심하고 편협하고 용기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살짝 일본에 대해 호감이 생기기도 했었습니다. 일본 호텔에 머물면서 손님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얇은 부착식 신발창이 있더라고요. 일회용 실내화가 아닌 일반 슬리퍼를 사용할 때, 실내화에 붙일 수 있도록요. 다른 사람의 맨 발이 닿았던 실내화를 신을 때 그 찜찜함을 이것으로 해결한 거죠. 삿포로 호텔 식당 식탁 위에는 낯선 봉투가 있었어요. 편하게 마스크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봉투였습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섬세하게 신경을 써준 듯하여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국과 브라질의 16강 경기가 있던 날, 삿포로 호텔에 있었습니다. 자정부터 시작된 일본 경기는 중계를 하더니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경기는 중계를 하지 않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스포츠 해설 방송에서 우리나라 얘기를 하더군요. 우리가 패배한 경기지만 당연히 최선을 다한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죠. 브라질이 넣은 4골 장면만 보여주더니 경기 설명을 끝냈습니다. 의아했어요. 한국 선수가 넣은 그림 같은 골 장면을 생략한 이유가 뭘까요. 원래 일본은 이런 식으로 경기 설명을 해왔을까요.
귀무덤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다시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가깝지만 먼 나라라는 얘기가 이래서 나온 건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