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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쨈빵 Jan 13. 2023

방언 기도

고린도전서 14장

        



예비 대학생의 1-2월은 꿈같은 기간입니다. 아무 걱정 근심이 없는 시기죠. 때마침 우리 교회 목사님이 다른 교회 부흥회 설교자로 가신다고 하더군요. 시간도 많겠다, 나는 너무 따라가고 싶어서 엄마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어른들과 교회 승합차를 타고 갔는데, 한겨울이라 초저녁인데도 무척 깜깜했어요. 교회는 한산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고, 입구에서부터 찬양 소리가 쿵쾅거렸습니다. 지하계단을 내려가니, 좁고 허름한 공간에 강대상이 놓여있었어요. 그곳에 꽉 들어찬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는데, 다들 반쯤 미쳐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춤추는 것도 아닌 사람들. 그곳의 분위기는 낯설고 거북했어요. 게다가 마이크를 붙잡고 계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어찌 그리 인상이 험악하신지.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주여, 주여, 할렐루야!” 하시는데, 나는 당장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너무 싫었어요. 점잖으신 우리 목사님이 왜 이런 곳에 오신 걸까 의아했습니다.

    

말씀 시간이 끝나고 기도가 시작됐어요. 찬양 반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주문을 외듯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건 또 뭐지?' 역시나 이상한 곳이었어요. 적응이 안 됐지만 조금만 참으면 집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도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양반주와 기도소리가 너무 커서, 내 기도 소리가 전혀 안 들렸어요. 그래서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막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갑자기 내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랄랄랄랄..’ 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침까지 줄줄 흐르는데 어쩔 줄을 모르겠더군요. 겁이 나서 울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분들을 안 좋게 생각해서 벌을 받는 건가?’


기도를 마치고 음악 소리가 잦아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랄랄랄랄..’ 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부끄럽고 무서웠어요. 목사님이 마무리 기도를 하시는 데도, 나는 소리 내기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목사님이 가까이 오셔서 내 등을 툭 치며 말씀하셨습니다. “절제해!”      


뭘 절제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만하라’는 말인 것 같아서 소리 내기를 멈춰봤습니다. 어? 멈춰졌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더 엉엉 울었습니다. 옆에서 어떤 분이 “아이고, 혼자 은혜 다 받았네!” 그러십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전도사님이 ‘방언’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처음 듣는 단어였어요. 집에 가서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보라고 하셨죠. 읽으면서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은 다음 날 전도사님께 전화해서 여쭤봤습니다. 내가 방언이 뭔지 모를 수밖에 없더군요. 여럿이 있는 공적인 예배 시간에 통역 없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러니 방언하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수밖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없다고는 못할 ‘표적’을 받은 겁니다. 놀랍고 기뻤어요. 지금도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다른 사람이 듣도록 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해야죠.      


간혹, ‘특별한 기도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 음성 들었다.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아요.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치 나에게만 하신 ‘귓속말’ 같은 거거든요. 하나님과의 소중한 비밀로 간직하면 됩니다. 사모님들은 특히 주의하시길 바라요. 하나님과 ‘더’ 친한 티를 내려고 마십시오. 나만 특별한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구는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굳이 나를 걸쳐 응답하실 필요가 있나요? 그 응답이 진짜라면, 당사자에게는 더욱 명확히 주실 것입니다. 무엇을 듣고 보고 꿈을 꾸더라도, 마음에 품고 잠잠하십시오. 받은 은혜를 떠벌리는 것은 그 가치를 가볍게 만드는 일입니다.

 

첫째 아이를 낳은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게 다 가짜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내 남편이 목사인데, 예수님의 부활도 천국도 없는 거면 어쩌나 싶어서 근심이 됐습니다. 그럼 망하는 거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과 모든 교회가 말할 수 없이 우스워질 생각을 하니, 가슴속에서 뭐가 쿵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여태껏 받은 은혜, 뜨거운 마음, 결단, 방언까지 모두 무색해져 버렸어요. 내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지만, 여전히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 때가 있어요. 누가 알면 부끄러울 텐데, 하나님만 알고 마시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주님이 없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라운 은혜를 수없이 경험하고도 얼마든지 딴소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믿음이에요. 겨자씨만큼도 안 됩니다.


사모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볼 때가 간혹 있습니다. 몸이 약하니까 아마 교회 일에 소극적이었을 거예요. 먹고사느라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서, 주일 낮 예배 겨우 드리는 것으로 최소한의 양심을 지켰겠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신앙생활에 소홀하다가 어쩌면 아예 믿음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누구를 비하하거나 판단하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단지 내 모습을 가정을 해보는 거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아시고, 빼도 박도 못하는 사모 자리에 두신 하나님의 ‘터치’가 기막히게 감사해요. 늘 울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어요. '예수 이름으로' 엄청난 일을 해내도, 사랑하지 않으면 소용없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계속 사랑해야 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고 어렵습니다. 받는 사랑을 옮기려면 아주 많이 수고해야 하니까요. 무슨 수로든, 부디 사랑하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쉬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알아요. 나와 교회의 믿음 자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세월이 갈 수록 더 사랑하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힘써 사랑하는 것이 전도고 선교예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처음 믿은 고3시절, 나는 이 말씀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공부 잘할 수 있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씀 같았거든요.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이 말씀이 내게 와서 부딪혔습니다. ‘못 할 게 뭐냐? 믿음이 있으면 손해 봐도 웃을 수 있고, 억울해도 참을 수 있고, 아파도 견딜 수 있어.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한 게 당연하지. 왜? 예수님을 믿으니까!’ 와우, 놀랍습니다. 힘들 때 감사해서 울고, 어려울 때 기뻐서 웃는 게 우리입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쟁이, 기도 밖에 모르는 크리스천이요.






이미지 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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