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버릴 수도 없고.
내가 처음에 이걸 목에 걸었을 때 기분은 어떠했더라. 조금 거추장스럽다, 하는 느낌 정도. 하지만 지금은 웬걸, 아침에 이걸 목에 거는 순간부터 정신이 아찔하다가, 사람이 맹수처럼 사나워진다. 어쩌다 나는 하루의 시작부터 사나운 맹수가 되어버렸을까.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는 차는 ‘쿵’하고 지면에 닿더니, 우레탄 방수제 위에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다 멈추었다. 시동을 끄고 카드를 챙겨 차에서 내리자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사람을 향해 훅 불어왔다. 차 특유의 냄새와 도로를 달리다 멈춘 바퀴의 탄 냄새가 뒤섞여 피할 새 없이 달려들었다. 거기에 한 번도 볕을 쬐어 본 적 없던 지하의 쿰쿰한 냄새까지.
아침부터 맡는 냄새는 이런 냄새다. 차에서 챙긴 카드 속 인물과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목줄로 휘리릭 감아말아 가방에 쏙 집어넣고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차들을 훑어보자 욕심대리의 차가 벌써 도착해 좋은 주차 자리를 선점한 것이 보였다. 깨끗이 세차된 그의 차를 바라보다, 이제야 도착한 스스로를 조금 한심해한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한 당찬 대리의 차를 확인하며 조금 안심한다. 별 걸 다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복도엔 새 건물의 냄새와 조말론 로즈향이 뒤섞여 진동하고 있다. 호호 대리의 향수냄새일 거라고 지레 짐작해 본다. 짙은 생장미향이 가득 찬 복도 옆에 난 비상계단문을 밀자, 어둡던 복도에 센서등이 반짝 켜졌다. 새로운 냄새가 밀려왔다. 한 번도 바람이 지나가 본 적 없는 곳의 냄새. 발자국 소리를 탁탁 내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이 냄새, 클라이밍장 신발장 옆을 지날 때 나는 냄새다. 암벽을 오르느라 땀에 젖은 신발에서는 고무와 초크, 발냄새가 섞여있다. 그 냄새가 왜 계단에서 나는 걸까. 그 냄새를 영 맡기 싫은 날은 엘리베이터를 탄다. 하지만 오늘은, 좀 걸어야겠다. 다리근육이 더 줄어들지 않도록.
커다란 통창에 비치는 아침 하늘을 지나쳐, 그리고 오점 없이 깨끗한 하늘색 페인트 벽을 지나쳐, 40개 남짓한 계단을 오르며, 어제를 이어가고 있는 나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생각도 잠시, 곧이어 문 앞에 도착한다.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어 문에 갖다 대자 ‘탁’하며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어제와 같다. 문이 열리자마자 이미 누군가 켜놓은 에어컨 바람이 덮쳐온다.
푸른 화분, 이미 북적거리는 사무실, 밝게 빛나는 모니터와 형광등, 커피를 내리고 컵을 씻는 소리들. 이곳은 새로운 현실 세계다. 팀장은 이미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컵에 물을 따라 자리에 앉으면 일과는 시작된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책상 위에 놓인 시들어버린 난초를 흘깃 보았다. 난초의 이파리 끝은 이제 검게 말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물을 주지는 않는다.
머잖아 사무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번호를 확인하자,
‘Anonymous(발신자 제한표시)’
그 사람이다. 숨을 가볍게 들이켜고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뭐하는데야팀 파사르입니다.
전화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들을 쏟아낸다.
-공모전 말인데요, 어떤 분야에 지원하는 게 합격에 유리할까요?
(그걸 답변할 거였으면, 공고문에 이렇게 올렸을 것이다. '이 분야에 지원하셔야 당선되기 수월합니다.')
-심사위원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니요.)
-제가 이런 거 많이 해봤는데요, 이런 데는 처음이에요.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한바탕 인간의 본성과 나의 본성을 확인한 후, 숨을 돌리자 또 다른 전화들이 몰려온다.
조금씩 인내심을 잃어가는 게 느껴진다. 자신이 정보를 취하는 것을 마치 권리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나는 알아야겠으니, 넌 그 답변을 내게 들려줘야 할 것.'
원하는 답을 얻든 얻지 못하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만의 답을 얻기 위해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내 앞에서 이성을 잃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 앞에 나는 방패처럼 우뚝 서 있어야 한다. 나는 방패다. 어떤 말이든 튕겨낼 수 있는. 하지만 방패도 녹이 스는 걸까. 오늘도 여느 때와 같았다. 몸이 아파 자주 연차와 병가를 쓰는 동료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늦은 오후 민원인은 동료를 찾았다. 여느 날처럼 오늘도 그를 조금 찾다가, 한숨 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수화기를 내려놓을 줄 알았다.
“담당자께서 자리에 안 계십니다. 메모 남겨놓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이 묻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러면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제가 지원금을 쓰려고 하는데, 체크카드를 써도 되는 거예요?”
나는 한숨을 쉬고,
“그 부분은 제가 담당자가 아니라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럼 그분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저는 한없이 기다려야 하나요?”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총괄책임자 누구예요? ”
팀장 나오라는 사람 앞에서 나는 팀장님을 비호했다. 팀장님은 실무자가 아니시고, 사업 관리는 담당자의 영역이라고. 그녀가 전화한 시간, 5시 34분이었다. 나는 업무종료시간이 다돼서야 전화를 해서 자신이 원하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펄펄 뛰는 그녀가 진심으로 짜증 났다. 그리고 자리를 자주 비워서 다른 사람에게 그 화가 돌아가게 하는 동료에게도 짜증이 났다. 자신이 돈을 제때 쓰지 못하면 그분이 책임지는 거냐고 화를 내는 그녀에게 네, 책임지실 겁니다.라고 했더니, 그녀는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한바탕 전화를 주고받고 끊자, 주변 분위기가 싸해져 있는 게 느껴졌다. 팀장이 오자, 나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하지만 팀장은, 그 특유의 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원인을 찾더니 '그렇게 대응하면 안 되지.'라고 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조용히 '네?' 하고 되물었다.
“답변드릴 수 없다고 하면 안 되고, 내일 담당자 오면 연락드리겠다고 했어야지.”
이게 바로 ‘너 T발, C야?’인 건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열이 받은 건지, 무안한 건지, 아니 둘 다인 것 같다. 그런 식의 사건 해석은, 미안한 말이지만, 신입사원인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 돈돈 거리는 그녀에게 '내일'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담당자가 없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고, 담당자의 개인번호를 마음대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돈 쓰고 싶다는 사유에 긴급하게 대응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지원금 신청을 늦게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팀장 눈에는 내가 잘못한 사람이었다. 민원을 자초한 사람. 그래서 팀장 자신의 고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항변을 하면서 열이 받았다. 그 후론 팀장에게 힘든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힘든 순간들은 파도가 치듯이 연달아 왔지만, 팀장은 힘든 일은 없는지, 빈말이라도 묻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다른 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외면하고 있었다. 직원의 힘듦까지 돌보기에는 자신 역시 힘든 사람이므로. 나는 그를 보며 나를 되돌아보았다.
‘나도 힘들 땐 나만 보이지.’
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십분 후에 퇴근 시간이 되어 왔던 길을 되돌아 지하로 내려갔다. 방수우레탄 위를 걸으며 오늘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다 목에 걸린 사원증을 걷어내었다. 손에서 달랑거리는 조그만 사원증 안에는 1년 전 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한심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