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피해 도망친 이 곳에서
광주에서 만나던 사람과 끝냈다.
내게 더는 마음이 없다던 그의 솔직함으로 마음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속이 다 데일 듯이 화했다. 열파스를 붙인 것처럼 그랬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을 말한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조차도 쉽게 오가지 않았다. 그런 연애는 처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연애.
그렇다고 그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 충분했던 날들이 있었으므로.
그날이 조금 더웠던가, 서늘했던가. 삐익삐익-소리를 내며 앞유리창을 쓸던 자동차 와이퍼를 교체하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이전에도 와이퍼를 교체해 본 적이 있어 그의 집 앞에 차를 대고 작업을 준비했다. 작업용 장갑을 끼고, 범퍼에 타올을 깔고 있자. 이윽고 퇴근한 그가 나타나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내 일을 가로챘다.
녹슨 암과 날카로운 단면의 와이퍼를 맨손으로 만지던 그.
그런 그에게 자꾸만 장갑을 권하던 나,
그런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맨손으로 와이퍼를 빼내려고 애쓰던 그.
사방이 어두워지고서야 마침내 세 개의 와이퍼를 모두 끼우는 데 성공한 그와 뜨겁게 환호하던 나.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며 새어나오는 미소를 짓던 그.
사랑스럽던 미소.
‘그래도 좋았지.’, 하는 건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다.
사소하기만 한 날들. 그는 내게 단 하루도 큰 행복을 주지 않았다.
배 아프게 웃고, 마음 편히 밥을 먹고,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
나도 그에게 그런 하루를 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여름날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러다 대도시인 삿포로를 벗어나 소도시 오타루까지 가게 되었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지인 오타루에는 유명 치즈케이크 본점이 있다. 인심좋은 노부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도 한장을 받아들고, 오타루 운하를 따라 걷다 마감 한 시간 전에 겨우 도착한 치즈케이크 가게
불친절한 점원의 눈치를 보며 주문을 한 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 부드럽고, 진한 우유맛이 나는 치즈케이크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맛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신치토세 공항에서 홀케이크 두 개를 사서 인천을 거쳐 광주까지 들고왔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던 향수와 함께.
그에게 치즈케이크를 가져가자, 그는 내 성의를 보아 부엌 한 귀퉁이에 서서 한 조각을 꺼내 먹었다. 우리는 그렇게 평범하고 즐거운 데이트를 하러 갔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삼척에 오고 난 이후로 우리는 금세 시들해졌다. 그는 자주 감정이 왔다갔다했고, 어느날은 다정했다가 어느날은 퉁명스러웠다. 그러다 "네가 삼척에 가버렸잖아." 라며 화를 냈다.
서로 감정이 옅어진 채로 헤어졌다. 하지만 그에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고, 우리는 대전에서 만나 열기 없는 데이트를 마쳤다. 그는 내가 공항에서 사온 향수를 가지고 와서 뿌렸다. 옅어진 감정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서 더는 사랑의 향기는 나지 않았다.
향기를 잃은 그를 보며 망연자실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도 향기는 옅었으므로.
사실 그는 연애에 있어 헌신적인 편이었다. 만나는 동안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고, 먹을 걸 사주고, 꾸준히 연락하고, 나를 즐겁게 하려 노력했다.
노력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때로는 마음보다.
하지만 그런 그의 크고 작은 노력들을 보고도 삼척으로 훌쩍 떠날 수 있던 것은,
그 헌신이 나를 향한 게 아닌 그저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그가 습관보다 마음으로 동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날, 우리는 갈피를 못잡는 연약하고 얕은 관계를 끝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끊어내고, 그로써 사랑이 아님을 확인받고, 멀쩡한 두 다리로 내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를 탓하고, 사랑을 조르고, 잘잘못을 따지고,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우회해서 갈 수 있는 법을 셈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관계가 끝난 이유를 되묻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이미 스러지고 있는 나를 위한 최선이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었고, 삼척이었고,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