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삼척에는 없는 것

가족

by 파사르

주말 오후, 삼척의 한옥 카페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앞으로 써나가고 싶은 에세이의 전개를 구상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구성이 정리가 되어가며 목차를 정리하는 속도가 빨라질 즈음, 젊은 여자 두 명이 부모를 모시고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에 들어선 한 무리의 가족에게 눈길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딸과 부모는 쉴틈 없이 대화했다. 종종 웃고, 자연스레 서로의 말을 나누었다. 그들에게 눈길이 한번, 두 번, 머물렀다. 혹시 알아차렸을까. 내가 그들을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혼자라는 것을.


카페 주변은 한적하고 경치가 좋았다.

나의 엄마아빠도 좋아했을 것 같다. 이런 카페에 오면, 머잖아 말주변 좋고 장난기 많은 나의 언니와 동생이 이런저런 얘기를 꺼낼 것이고, 꺄르륵 웃으며 나도 한마디 껴들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런 장면을 상상했다.


가족과 멀어지니, 마음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부모님이 수술한 무릎과 휘어진 허리로 밭으로 가는 것을 보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다. 숨에서 쇳소리를 내며 힘겨워하는 그들을 내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그들의 신체적 고통도 영영 사라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이 건강하게 오래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믿고 싶은대로.

엄살이 많은 아빠는 자식인 내가 집에 있을 때만 유독, 무릎을 쥐어보이며 나를 향해 아프다는 소리를 했고, 엄마는 왜 딸이 있을 때만 앓는 소리를 하냐며 으르렁대었다. 엄살이 없는 엄마는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아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이 아프다, 하고 말았고, 고되게 일을 하고 난 다음날엔 어김없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성급하게 왜 또 그러냐고 물으면, 허리가 너무 아파, 조금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종종 어휴, 하고 말았다.


그런 부모의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동생과 언니는 집이 좁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멀다는 이유로, 나가 살았다. 나는 돈이 없어 부모 집에 얹혀살았다. 주말마다 집안 청소를 했고,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했고, 부모를 어디론가 데려가서 먹이고, 부모의 일을 대신 했으며, 엄마를 태우고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묘종을 심고, 고추를 따고, 깨를 털었다.


부모에게 많이 짜증을 냈고, 한편 더 많이 웃었다.

카메라를 들고 밭에 올라온 철없는 딸에게 사진 많이 찍었냐고 묻던 엄마 덕분에


부모가 결혼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장만한 손바닥만한 아파트에서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아픈 기억과, 좋은 기억이 엉킨 채로, 무심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버티던 시간을 언니와 동생이 이어받는 걸 보고, 늑장을 부렸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집안의 유일한 직장인이 되었다.


동생은 서른이 되자 일을 그만 두고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학창시절 내내 공부라는 걸 한 적이 없는 아이였다. 한번은 14살이던 동생을 앉혀놓고 영어 문법을 알려 준 적이 있는데, 열심히 듣는 척 하더니 어느새 꾸벅꾸벅 졸았다. 학교 수업도 듣지 않던 아이라, 내 말도 무슨 말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두어번 더 수업을 했지만, 동생은 나한테 배우기 싫다며 도망쳤다.


동생은 군대를 다녀오고는 ‘돈’을 많이 벌겠다며 장사에 뛰어들었다. 어떤 모자란 인간은 마트에서 고기를 파는 동생더러 조선시대로 치면 ‘백정’ 아니냐고 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역정을 내었지만, 외로웠을 것이다. 어린 애가 들을 말이 아니었다.


육가공회사에 취직한 뒤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탑차에 고기를 싣고, 전국을 누볐다. 눈 펑펑 내리는 겨울이면 엄마는 늘 마음을 졸였다. 어린 애는 명절이면 고기를 수십만원 어치를 끊어서 식구들에게 요리를 해먹였다. 꼭 혼자 사는 삼촌을 같이 불러서. 덩치만 커진 동생은 한참 동안 사춘기였다. 가끔 웃었지만, 더 많이 짜증내었다. 마치 자기가 가장인 것마냥 무거운 얼굴로.

나이 서른이 넘어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싶어했다. 아빠에게 좋은 차를 사주겠다나. 결혼하려면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야한다나. 엄마는 늦은 나이에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는 동생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또 울려고 하길래, 나는 ‘늦은 나이에도 공부하면 좋은 거지, 왜그래?’ 했다.


동생은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다가 성과 없이 시간이 흐르자 초조해하며 많이 힘들어했다. 시험 기간에 배앓이를 자주 하는 게 나랑 똑같았다. 십 수년 전, 내게 영어 과외를 받으며 졸던 어린 동생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 때 조는 동생을 잘 타일렀더라면, 동생을 많이 칭찬해줬더라면, 동생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동생은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을까.

아니, 적어도 지금 덜 힘들어 했을까.


동생은 공부를 시작하며 용돈을 요청했다. 다달이 기록해놓고 합격하면 갚겠다고 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매달 적은 용돈을 보내었다. 언니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보내었다. 언니는 내게도 똑같이 했었다. 계절마다 백수인 나의 옷을 사주었고, 복지카드로 부모의 옷과 신발을 샀다. 그러고 나면 복지카드 잔고가 비었다. 자신의 것은 없었다.


강의를 듣는다는 명목으로 양심없이 언니의 아이패드를 빌렸는데, 화면을 깨먹어서 언니에게 더 좋은 걸 사주겠노라 약속했었다. 하지만 언니에게 사주지 못했다. 언니는 장난스레 면박을 주면서 정작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저임금 공직사회에서 끝없는 민원과 강도 높은 업무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언니에게 기생하여 살던 내가 밉지도 않은지, 언니는 며칠 전에도 내게 모자 하나를 골라보라며 링크를 보낸다. 자기나 사서 쓸 것이지. 그런 언니가 이제는 쉬고 있다.


제법 시간적 여유가 생긴 언니와 동생이 내가 집에서 하던 역할을 이어받았다. 동생은 가진 것이 없어 더 벼려진 부모의 끝없는 걱정과 타협없는 우직한 인생살이를 두고, 나보고 어떻게 버텼냐며 장난스레 푸념했고, 나는 이제 백수인 너가 감당해야할 몫이다, 할까하다가 참았다. 언니는 엄마와 이모를 따라 밭으로 나갔다. 내가 그랬듯이 종종 밭에서의 엄마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에는 영원할 것 같은 애정과 애틋함이 고여있다.


모두들 자기 자리에서 천천히 행복해지길 바라며.

나는 좀 더 이곳에 머물러야겠다.

언젠가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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