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내식당
태생이 마른 인간인 나는, 몇 달 전만 해도 끼니를 챙기는 걸 힘겨워했다.
회사에서의 식사마저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식사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밥 먹을 때 이런저런 해찰을 한다며 늘 혼났다.
"빨리 먹어. 엄마 상 좀 치우게."
밥 먹으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혼자 공상에 빠져있기도 하느라 내가 밥을 제일 늦게 먹었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다. 퍽퍽한 맨밥에 나물 반찬을 조금 집어먹다 보면 밥이 도무지 굻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처음 보는 음식을 많이 맛봤다.
1학년이었을 때, 같은 학교를 다니던 언니 반에 찾아가 그 조그만 나무 의자에 같이 앉아있었는데(이유는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되자 교실 문이 드르륵, 탁, 열리며 배식반이 등장했다. 점심을 먹지 않는 1학년인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언니 책상 위에 식판이 올려지고 거기에 짜장과 밥이 양껏 담겨졌고, 새빨간 딸기가 올라왔다. 급식을 나눠주는 아주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딸기를 더 주셨다. 언니는 친구들이 나를 예뻐하더라며 뿌듯해했다.
80년이 넘은 학교의 재건립 공사가 끝나고 급식소가 생긴 후로 처음 본 음식은 '해파리냉채'였다. 겨자 맛이 나는 질겅질겅 해파리냉채, 그것을 입에 넣어 오물거리다가 '아, 이건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놓은 게 아닐 거야.' 생각하며 남겼다. 그 뒤로도 해파리냉채는 항상 남겼다. 어쨌든 세상엔 이런 음식도 있구나-, 했다. 선생님들은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이 되자 밥을 제법 많이 먹었다. 엉덩이 뼈가 의자에 닿지 않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학년 수험생이 되자 주말에도 학교를 갔는데, 그때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반찬은 늘 비슷했다.
양파를 넣은 계란말이, 햄, 김치볶음.
누렇게 변색된 반찬통에 정성스레 담긴 반찬들이 어느 날은 고마웠다가, 어느 날은 부끄러웠는데, 반찬통을 열면 풍겨오는 냄새가 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갈하려고 애쓴 반찬을 볼 때, 평소엔 무심하던 나의 엄마가 나에게 이만큼의 사랑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에 가슴이 쭉 펴지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학식을 먹거나, 주요 단과대 근처 식당에서 2500~3500원하는 참치비빔밥, 참치찌개, 왕돈가스, 돌솥비빔밥 같은 걸 줄기차게 먹기 시작했다.(10년도 더 된 시절의 물가이다). 지금 떠올리면, 그때 그 음식들을 맛있다며 먹었던 게 조금 짠하다. 가장 건강할 때, 조미료로 맛을 낸 맵고 짜고 단 음식들, 그마저도 밀가루나 쌀이 주재료인 식사로 매 끼니를 해결했다는 게.
거기에 그 별 볼 일 없는 뒤풀이들에는 왜 그렇게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지. 두부김치와 우동을 제일 많이, 배불리 먹고 난 뒤에는 선후배, 동기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마지막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가난했고, 무지했고,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 눈에 보이던 세상은 여러 색으로 굴절되어 빛나며 매 순간 나를 매혹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본 세상.
그 길고 긴, 밥에의 역사.
하지만 밥의 역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백수의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기나긴 백수생활을 겪으며 프리즘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지와 어리석음'이라는 프리즘으로 굴절된 현란한 빛은 애당초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온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빛깔이었다. 남들이 이룬 걸 이루지 못한 나는 매 끼니를 해결하는 게 곤욕인 사람이 되었다. 어떤 날은 애써 챙겨 먹고, 어떤 날은 먹지 않고 버텼다. 살기 위해 먹는 하루가 끝도 없이 반복되는 게 지겨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종국에는 식사대용 알약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밥에 대한 일말의 애착조차 사라진 것이다.
백수의 시절을 지나 취직을 하자, 이제 밥 먹는 일이 퀘스트가 되었다. 직장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시간을 통해 멀어지지 않아야 하는 퀘스트. 대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학과는 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왜 이렇게 말랐는지, 어디가 아픈 건지. 소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듯, 우리는 친해지기 위한 경청과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른의 대화법이 그런 걸까.
저마다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가까워지려고 애썼다면, 방법이 먹히지 않았다.) 대화가 지루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간혹 선을 넘는 사람이 있었기에, 차라리 겉도는 대화가 낫다고 판단했다.
밥을 먹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알약 대신 맛있는 한 끼를 내심 바란다.
대화는 어떻게든 해볼 테니 나가서 먹고 싶다.
삼척에 온 후로 편의점 김밥과 냉동 닭가슴살, 샐러드를 전전한 탓이다.
회사에서라도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싶은데.
새 회사에는 구내식당이 없다.
그렇다 보니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 오거나, 도시락을 주문해야 한다. 도시락은 짜고 맵다. 회사 주변은 거의 불모지다. 불모지에도 풀 한두 포기는 나지만,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포함한 회사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 오거나, 라면을 먹거나, 도시락을 배달시키는 것을 택했다. 황량한 점심 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근처 회사에서 구내식당을 오픈하였다. 다행히도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었다. 상기된 팀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내부는 밥 찌는 열기로 축축했고, 한편 쾌적했으며, 맛있는 냄새를 보란 듯이 풍겼다. 그리고 마침내 따뜻한 국과 밥, 시원한 반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허기진 날들이 보상받는 유일한 시간.
불모지에서 그 조그만 구내식당은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조금만 이동하면, 낮 12시에 모든 이가 가장 간절히 원하던 바를 얻게 되었다. 매번 다른 국과 반찬을 적정량 담고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정의 금액으로 식권을 사서 내민다. 그럼 직원분은 국을 퍼주시면서 맛있게 드세요,라는 인사말씀까지 곁들여주신다. 음식으로 풍요로운 그곳은 식당 직원분들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무실에서 제공하는 것이 '맛있는 한 끼'라니. 그들의 노동력의 대가가 무려 소중한 한 끼라니.
이렇게 따뜻한 재화의 교환이 또 있을까?
구내식당이 오픈된 이후로, 삼척에서 내가 많이 슬퍼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성이 담긴 밥으로 위로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밥으로 슬퍼하지 않도록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몇 년간 식사를 성가신 것을 볼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구나 싶은 요즘. 맛이 있건 없건 밥 한 공기를 다 먹는 날이 늘어나고 있다. 밥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려는 걸까. 뭐가 맞는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