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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19. 2022

산속의 미아

  당신이 없는 집안은 생명이 빠져나간 허물처럼 스산하다오. 전염병이 두 해가 넘도록 기승부려 온 세상이 어수선하여도, 넌지시 남의 일처럼 혀를 차던 ‘확진자’라는 진단이 당신에게 닥칠 줄이야…. 애꿎은 상심과 불안을 무슨 말로 달랠까. 격리된 병상에서 심심풀이라도 하랍시고 손편지를 쓰는데, 몇 장을 구겨 놓고도 당최 이어지지 않아 턱을 괴고 창밖 멀리 수락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오. 불현듯 당신과 함께 걷던 숲속에 가면 답답한 가슴이 뚫려 맞춤한 말이 생각나려나, 대뜸 신발 끈을 묶었지요.     

  숲정이에나 가려던 오후의 산책이 걷다 보니 짐짓 산행이 되어 버렸소. 어느새 중턱의 길목, 너럭바위에 다다라 마스크를 벗고 숨을 고르니 과연, 아래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오.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지나는 듯이 말이오. 가을 색으로 바뀌는 나뭇잎 사이로 기우는 햇살이 비치고, 등을 미는 바람이 시원하였소. 괜스레 더 쓸쓸해 보이는 마을은 멀어져 그림이 되고 잡다한 소음들이 아련해졌다오. 당신과 함께라면 부러 장난이라도 치겠는데, 상수리나무 우듬지에서 짝을 찾는 까치 소리에 움찔하고 씁쓸히 웃었네요. 오솔길로 접어들어 손길 닿는 나무를 안아 주며, 혼자 불안해할 당신인 양 토닥였다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발길 따라 오르게 된 산이지만, 이왕 왔으니 잠시나마 다 잊고 일탈하듯 산에 더 빠져들고픈 마음도 들었소.

  산은 늘 스스로 그러한데, 영험이 센 자린지 누가 바위 앞에 터를 만들고 향과 초를 꽂아 두었구려. 숙연히 합장하고 돌아서 보니, 휜 소나무 가지에 머물다 떨어지는 해가 속울음을 토한 듯 하늘가 붉은 강이 산색까지 물들이고 있었소. 나무들은 퇴색한 이파리 떨구며 지난 계절 이야기 여미느라 떨고, 어깨동무하며 토닥이는 숲은 기꺼이 순환의 흐름에 어우러지는 모습이더이다. 나는 또 길에서 외떨어진 나무에 다가가 가슴과 얼굴을 비비며 보듬었다오. 올려다보니 화답하듯 살랑이는 나뭇잎들 그림에 하늘은 여백이었소. 우리가 모르는 숱한 만남과 헤어짐과 기다림을 아는 산이 더러 바람을 일으켜 나무들의 속앓이를 달래더이다. 낙엽들이 그 바람에 실려 제 갈 길로 흘러가는데, 내가 왜 가슴이 아렸는지 모르겠소. 보이지 않는 문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라지는데, 나는 보이는 곳에 갇혀 보이는 것들 사이를 걸을 뿐이었다오.

  상념 중에 불쑥, 아는 길 말고 다른 길을 찾고 싶어졌소. 모험이라기보다 시간을 아끼려 질러갈 속셈이었다오. 길이 아닌 가파른 언덕으로 나무 사이를 기어 골짜기를 지나 등성이에 올라섰는데, 눈으로 본 짐작은 어긋났고 방향도 알 수 없는 낯선 곳이었소. 침점을 쳐야 하나, 선택 앞의 망설임에는 두려움이 장막을 치기도 하지만, 난관을 뚫지 않고 포기하면 어찌 산을 오르겠소. 나는 기필코 새길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에 매달려 위로, 위로 올라가야만 했소. 올라가면 보일 줄 알았지요. 그런데 또 잘못 들어선 암벽에선 다리가 떨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었소. 간신히 손끝에 걸린 나뭇가지를 당겨 잡고 겨우 올라섰다오. 바위틈에 뿌리내리고 구부러지게 자란 그 나무는 오로지 나를 위해 거기 있었으리다. 거듭 쓰다듬고 한숨 섞인 입맞춤을 했다오.

  드디어 등산로를 만났소. 게다가 저만치 산마루가 보이기에 목청껏 쾌재를 외쳤다오. 내처 이내 낀 하늘빛이 마중 나온 데까지 허겁지겁 당도했는데, 아! 아니더이다. 내가 가려던 정상이 아니더이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의 관문 같은 작은 봉우리일 뿐이었다오. 젖은 어깨를 토닥이는 바람마저 놀리는 듯하였소. 숲에서 헤맬 때는 보이지 않던 정상이 그제야 그 너머에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더이다. 몸과 마음이 처져 드러누워 버렸소. 또 선택의 기로였지요. 정상이 코앞인데 포기하자니 다 이기다가 지는 기분이고,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데 산은 곧 어둠에 잠길 테니 어찌하겠소. 저 아래 내가 잠시 벗어난 도시는 고향처럼 아련히, 어둠에 대들 듯 반딧불 같은 빛들을 밝히고 있더이다. 그래, 길은 정상으로 가는 소용만이 아니란 생각에 퍼뜩 끄덕였다오. 당신이 곁에 있었다면 말릴 걸 믿고 호기롭게 오기를 부렸을 테지요.

  어스름은 잠깐이었소. 밝음과 어둠이 교차할 때, 숲과 나무는 잠시 술렁이다가 대번에 짙어지는 어둠에 안기며 순응하더이다. 외려 그 속에 깃든 풀벌레와 새들의 아우성이 한참 울렸다오. 준비 없이 욕심부린 산객에게 어둠은 더듬는 길마저 가려 버리는 마군이었소. 길든 터전이 아닌 산속에서 홀로 맞닥뜨린 어둠은 내가 별 것 아님을 여실히 일러 주더이다. 목숨조차 여느 숨탄것들과 다를 바 없었소. 한순간 헉, 허방을 디뎌 굴러떨어지다 나무에 걸려 멈췄지요. 아뜩했고 와락 겁이 났다오. 눈두덩의 피를 누르고 접질린 다리를 끌며 한사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려 애쓸 따름이었소. 올라갈 땐 질러가려던 객기로 길을 잃었고, 내려오면서는 당연히 아는 길이 이어지리라는 어설픈 믿음이 화를 불렀지요. 기는 짐승처럼 본능의 감각과 의지를 곤두세워야 했소.

  새소리에도 질겁할 어둠에 벌벌 떨다가 정신을 다잡으려 악을 썼다오. 온갖 잘못을 빌며 기도하는데, 저만치 당신이 보이더이다. 걸을 수 있음이 고마워 눈물이 흘렀소. 그래요. 운이 좋았소. 길 아닌 길을 기다시피 헤쳐 내려왔는데, 느닷없이 처음 오를 때의 길이 나타났다오. 아! 그대 생각하며 앉았던 너럭바위가 보이더이다. 시공이 다른 곳으로 통할 듯했던 길목도 기운도 사라진 주변은 그새 몰라보게 달라졌소. 산을 오를 때 그곳은 햇살에 비친 나무와 숲과 오솔길이 마음을 달뜨게 했는데, 내려올 땐 빨리 벗어나고픈 어둠뿐이었소. 윤곽을 지우고 불빛만 명멸하는 도시 위 허공에 번진 희붐한 잔영이 얼마나 반갑던지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회포가 이럴까. 어쩌면 다 까닭이 있고 순간순간이 메시지일 텐데, 난 그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와 감격에 젖었소. 절름거리면서도 얼른 내가 길든 우리 집에 갇히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구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나니 날이 바뀌었소. 포도주 두 잔을 따라 책상에 둔다오. 당신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던 편지가 엉뚱하게 산행 보고가 되었구려. 당신은 아픈데, 원인을 탓하며 잡생각에 끓는 나를 산이 불러 호되게 가르친 것이오. 삶의 길에는 크고 작은 행불행이 섞여 있는데, 뜻대로 고르거나 내버릴 수는 없잖소. 그래서 세상은 비유로 가득한가 보오. 산속의 고통에서 반짝 빛난 삶의 의미는 기쁠 때와 달리 가슴을 찌르더이다. 당신이 빛이었음을 알아주오. 몸 아픔은 정화의 제의이기도 함을 알았소. 관계되고 오고 가는 섭리를 다 알지는 못해도, 사랑과 믿음의 빛은 지나가는 아픔을 짧게 하고 기쁨을 비추리다. 자, 잠시 떨어져 있어도 우리 살아있으매 축배를!     

*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2022년 문학창작지원금 선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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