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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19. 2022

바람, 바람

  산정에 올라서니 세찬 바람이 우리를 맞이한다. 아니, 내몰듯 거세게 떠민다. 머리보다 높게 진 배낭을 내려놓자 몸이 붕 뜨는 듯하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올라올 때의 바람이 미풍이었다면 산꼭대기의 바람은 맹풍이다. 바람은 그냥 불 따름인데, 그 바람에 흔들리며 맞아 주는지 떠미는지 생각한 내가 같잖아 픽 웃는다. 땀에 젖어 풀었던 앞섶을 여미고 다리에 힘을 주어 바람에 맞서니, 오래 잊었던 쾌감과 해방감이 되살아나 쾌재를 부른다. 팔을 뻗어 활개를 치며 거푸 바람을 들이켜 큰 숨을 쉰다. 새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파고들어 추위에 아랑곳없이 머리가 말개진다.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원적산 정상은 바위도 없이 펑퍼짐하고, H자로 표시된 헬기장이 있다.

  동쪽으로 이천시가 널찍이 펼쳐졌고 서쪽과 남쪽은 빈 들녘에 드문드문 마을과 집들이 보인다. 능선이 이어진 북쪽 천덕봉 너머로 먼 산들이 운해에 잠겨 아련히 넘실거린다. 등산로 반대편에는 ‘포사격 훈련장이니 불발탄 위험이 있다’라는 경고문 뒤로 철조망이 이어져 있다. 대뜸 단절과 아픔이 연상되어 산과 수풀이 딱하다 싶어도 또 객쩍은 내 생각일 뿐이다. 희읍스름한 구름이 하늘을 가려 해넘이 광경은 아쉽게 되었지만, 소풍 나온 아이처럼 촐랑대며 텐트를 치고 짐을 푼다. 풍경화에 그어진 낙서 같은 철조망을 흔들며 몰아치는 바람은 텐트를 날려 버릴 기세다. 대장이 야물게 친 텐트는 별천지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안과 밖과 문이 생겼다. 산상에 새로 돋아난 조그마한 별에서 우리만의 잔치가 벌어졌다. 어쭙잖게 세상이 발아래 있다고 여겨진다. 

  “대장 덕분에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누리네! 이런 막강한 장비들, 난 처음 봐.”

  “나야 뭐, 반은 산에서 사는 셈이니… 세 사람 장비는 충분하니까 언제든 말만 해. 한겨울엔 이 정도 산이 안전해. 날 풀리면 더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도 좋고….”

  “아까 배낭에 짓눌려 발이 안 떨어질 땐 이 짓을 왜 하나 싶었는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먼…. 하! 이런 바람 소리를 언제 어디서 듣겠어?”

  술잔이 오가며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물처럼 샘솟고 맴돌다 흐른다. 살아온 길과 성향이 다른 세 사람이 늦깎이 문학도라는 한 가닥의 인연으로 만났다. 하물며 새해 벽두에 산마루에서 교감하는 하룻밤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살아온 삼십여 년의 세월과는 다른, 새 바람을 갖고 꿈을 이루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 지난날의 성과 따위는 흘러간 물이 되었다. 깊어 가는 시간은 배경음악이 된 바람 소리와 흘러간 사연과 남은 열정이 그득히 찰랑거린다. 술도 안주도 대화도 맛깔스러워 단꿈 같은 시간을 깨고 싶지 않은데, 마침내 무릎과 허리가 비명을 질러 댄다. 대장이 세 개의 매트와 침낭을 깔았다. 손전등을 밝힌 별은 돛단배가 되었다.

  허공에 이는 풍랑이 배를 흔든다. 둥실 떠가는 시간과 공간을 잠에 뺏기고 싶지 않은 나는 혼자 술잔을 들고 돛대처럼 흔들린다. 바람 소리는 유혹이기도 하다. 텐트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다시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경계가 지워져 가뭇없는 어둠의 바다에 고깃배의 불빛처럼 사람의 집들이 반짝인다. 고개를 드니 바로 위에 북두칠성이 있다. 북극성을 찾았고 카시오페이아를 찾는다. 크고 작은 별들이 초롱초롱 재잘거리던 고향의 밤하늘이 세월을 접어 머리 위에 와 있다. 몸을 떨며 바람에 주춤주춤 밀리면서도 젖힌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본다. 휭, 휘잉, 바람이 공중에서 바람을 만나 소리를 낸다. 아무 걸림 없이 허공을 지나가는 바람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람은 무엇을 만나야 존재가 드러나고 수만 가지 소리를 낸다. 고치 같은 침낭 속에서 애벌레처럼 옹그려 소리를 듣는다. 펄럭퍼르륵 빠라라라락 따따따따따, 안과 밖의 벽이 된 천막이 세차게 물결치다가 떨다가 울기도 한다. 소리는 한순간도 같지 않고 되풀이되지도 않는다. 소리가 산에서 깜빡이는 별을 휘감고 있다. 공중으로 떠오를 듯 요동치는 돛단배는 파도 같은 바람을 헤쳐 낸다. 피할 수 없는 바람을 맞받아 순간마다 다른 소리로 바꾼다. 같은 별이 없듯이 땅에도 공중에도 같은 바람은 없다. 두 친구는 꿈결에 어느 별로 갔는지 기척이 없다. 바람 소리는 슬그니 기억 저편의 바람 소리를 부른다. 오래도록 기억에 가라앉았던 소리가 일어나자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린 시절, 봉화산 기슭 외딴집의 뒤란은 대숲이었다. 츠츠츠스스스, 쉐엑쉐에솨아아, 츠륵츠르츠으, 끊임없이 바뀌는 바람 소리는 봉창에 달빛 가득한 밤이면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때는 바람이 운다고 생각했다. 귀신인지 짐승인지, 흐느낌이다가 아우성치다가 호곡성이 되기도 했다. 파락파라락 문풍지 떨리는 소리 곁에서 귀뚜라미가 그 울음을 달래듯 자지러졌다. 꺼어어, 바람 소리 속에 느닷없이 이름 모를 새가 어미의 속앓이 같은 울음을 토하기도 했다. 바람은 낮과 밤이 다르고 나날이 다르고 철 따라 달랐다. 나는 들과 산에서 색색의 바람을 마시고, 내 안에 바람이 차는 줄도 모르고 자랐다. 바람은 늘 밖에서 불어 왔고 밖으로 내몰아서 고향은 먼 그림이 되었다.

  바람은 늘 어긋났다. 바깥에서 부는 바람은 나를 벌벌 떨게 했고, 내 안의 바람은 방향을 잃기 일쑤였다. 일과 책임을 떠안은 도시에선 바람 소리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부추겨 등 떠미는 바람에 밀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을 넘고 나아가느라 꿈은 시르죽고, 내 안의 바람과 어긋난 길에 내몰려 늘 목이 말랐다. 산들바람에 실려 우쭐거릴 때나, 바람막이가 되어 폭풍우에 쓰러질 때나, 세상은 겹쳐 있었고 나는 세상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올가미에 걸린 줄도 모르고 허덕이다가 바람이 빠져 버린 몸에 숭숭 구멍이 나는 줄도 몰랐다. 죽음을 경고하는 진단을 받고서야 일을 접고, 마지막 여행인 양 엄동설한에 홀로 집을 나섰다. 할퀴고 간 바람을 잊고 새 바람을 맞아야 했다.

  입산 금지를 어기고 오른 소백산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하얗게 지워진 길을 더듬어 오를 때, ‘바람은 홀로 울지 않는다’ 속삭이는 바람의 말이 들렸다. 마른 잎을 스쳐 온 바람과 빈 가지를 지나온 바람의 소리가 달랐다.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바람의 세기도 달랐다. 연화봉에서 몸을 붕붕 띄우는 눈바람에 맞서 지지대를 붙들고 간신히 비로봉까지 갔다. 눈도 못 뜰 눈보라를 뚫고 국망봉까지 가려던 억지는 부질없었다. 바람을 잃은 몸과 마음이 매섭게 혼나는 순간이었다. 용틀임하다 멈춘 산줄기들이 바람 아래 하얗게 엎드려 있었다. 이제는 나의 바람을 찾으리라 다짐하는데, 흐르는 눈물을 바람이 훔쳤다. 하산 길에 어깨를 토닥이며 스쳐 가는 바람은 천의 얼굴이었다.     

  바람이 이끈 상념은 돛단배처럼 바람 따라 흐른다. 바람은 머물지 않는 흐름이다. 바람이 멈추면 거기엔 이미 바람이 없다. 바람이 되지 못한 공기만 있다. 바람결은 대상에 따라 흔들고 파고드는 정도가 다름을 몰랐다. 숱한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내 안에서 일어난 바람도 흘러갔다. 이제 다시 가슴을 흔드는 새 바람에 나를 실을 때이다. 도전도 성취도 당기거나 이끌려 가지 않고 머물면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바람은 무지개 같을지라도, 바라고 향하는 열망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흐름은 쉼도 없고 끝도 없는 변화이다. 흐르는 시공간의 변화무쌍을 바람은 극명하게 보여 준다. 바람은 바람을 만나 더 큰 바람이 되기도 하고 홀연히 사그라지기도 한다. 또 바람은 만남을 위해 기다릴 때도 있다. 내 안에 다시 이는 바람은 긴 기다림 속에 있었다.

  선잠이 들다가도 퍼뜩 깨어 혼자 작정한 ‘염원의 시간’을 기다린다. 산정의 세찬 바람에 나의 바람을 실어 해돋이 순간의 새 빛에 엮어 가슴으로 듬뿍 받을 생각에 설렌다. 바람이 익은 기다림은 기대감으로 부푼다. 잠을 털고 나오니 어둠 속에서 바람이 와락 달려든다. 갓밝이에 서서히 물러나는 어둠이, 밀려오는 밝음과 임무를 교대하는 비밀스러운 정경이 펼쳐진다. 바람은 나를 어르듯 옷깃을 채고 등을 두드린다. 드러나는 들판과 마을 너머 수묵화 같은 산 그림자 위로 붉은 융단이 기다랗게 깔린다. 해는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엊그제 1월 1일에는 날씨가 흐려 서울에서는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해는 매일 뜨는데, 사람들은 달력의 날짜에다 의미를 새기며 손을 모은다. 산정에 올라오는 사람이 많아지고, 두 친구도 텐트에서 나와 기지개를 켠다. 

  드디어, 황금빛 광선이 팽팽히 솟으며 방사된다. 어느 바람이 밀어 올렸을까. 빛살들이 떨리며 점점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그 복판에, 지상의 색깔이 아닌 빛 덩어리가 뭉글뭉글 올라온다. 삽시간에 온 들판과 마을과 산이, 내 가슴까지 빛의 오라(aura)에 휩싸인다. 손에 잡힐 듯한 덩어리는 거리도 크기도 가늠할 수 없다. 웅웅웅 바람 소리와 닮은 빛의 소리가 울린다. 바람에 실려 둥실둥실 떠 있는지, 바람이 빛을 받아 흩뿌려 주는지 온 누리가 빛에 젖는다. 해라고 믿기지 않는 살아 있는 영체가 한달음에 가슴으로 쑥 들어올 것만 같다. 내가 솟구치기만 해도 빨려 들 듯해 숨죽이는데 심장은 대책 없이 쿵쾅거린다. 형용할 수 없는 모양과 색으로 불끈거리는 우주의 심장과 내 심장이 만나고 있다. 태초의 경이를 보는 이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산과 들과 강을 깨우고 돌아왔는지 신바람 난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해가 솟아오르자 아침은 대번에 밝아 왔다. 여태 떨고 있는 내게 다가온 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오늘은 일출이 좀 별로네. 하긴 뭐, 볼 때 그때뿐이지만…. 소원은 빌었어?”

  “나, 이리 떨리는 감격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그저 손 모으고 바라만 보았네….”

  “산에서 생활하면 별것도 아냐. 가끔 내가 누군지, 뭘 하는지는 생각하지만….”

  “내가 별이라면 어떤 빛을 낼 수 있을까…, 내가 바람이라면 어디로 갈까….”

  해를 등지고 나를 향해 웃는 대장에게 후광이 어려 눈이 부시다. 어제와 달리 화창한 오늘, 아침을 지어 먹고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하산하는 우리를 바람이 토닥인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2022년 문학창작지원금 선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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