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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19. 2022

흰머리, 하늘못, 배달의 웅비여!

  나라가 나뉜 지 74년, 통한의 아픔이 아물지 않은 이 땅에서 국토순례는 미완의 염원이다. 그렇더라도 민족의 영지(靈地) 백두산은 그 정점이 아닐 수 없다. 동쪽의 울릉도와 독도, 서쪽의 백령도, 남쪽의 마라도에도 다녀오고, 북쪽 끝 함경북도 온성군에는 가지 못하니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녀왔다. 그러니 더욱 백두산은 가슴에 맺힌 앙망의 숙제가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여행사에서 모집하는 단체관광으로 쉽사리 다녀올 수도 있지만, 전에 금강산 관광처럼 길이 열려 우리나라 땅을 밟고 가고픈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나 한 듯 작년 9월 20일, 남과 북의 정상이 함께 백두산에 올라 천지에 손을 담그는 역사적인 모습을 TV로 보았다. 그러나 남북의 화해무드는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소강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가야하는데 더 미룰 수 없었다. 다른 여행도 아니고 이런 뜻 깊은 여행은 마음 맞는 길벗이 또 얼마나 중요한가! 궁리하다가 취미 삼아 나가는 한시 모임에서 말을 비췄더니 회장을 비롯하여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5명이 7명이 되더니 9명이 되었다. 배를 타고 가서 기차를 타자, 배낭여행을 하자, 가는 김에 어디를 들르자, 말들이 많다가 결국 가장 쉽고 편하게 여행사 상품을 선택해 따라가기로 정했다. 드디어 지난 7월 중순, 늙은 청춘의 만학도들은 우리의 선조 배달나라 옛 땅과 배달민족 역사의 현장을 간다는 설렘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공항에서 일가족 8명과 무슨 면 이장들 10명이 합세해 27명이 되었다. 지척에 두고도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를 타고 남의 나라에 돈을 뿌리며 빙 둘러가는 여정은 못내 딱하고 억울했다. 그래도 여느 여행과는 달리 우리는 사뭇 진지하고 가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비행시간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인천에서 8시 50분발이었는데 션양(沈陽)에 도착하니 1시간 시차 때문에 9시 45분이었다. 가이드를 만나 심양 북릉(청나라 태종의 능)과 조선족 밀집지역인 서탑 거리를 관광했다. 심양이 청나라의 수도였을 때, 동서남북에 탑을 세웠다는데 여기가 서쪽의 탑이 있는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는 버스를 타고 거의 5시간이 걸려 퉁화(通化)에 도착해 동산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통화는 심양과 백두산의 중간쯤에 있는 숙박지여서 내일 아침에도 버스로 이만큼의 시간을 가야 한다니, 과연 듣던 대로 백두산은 엉덩이로 가는 여행이구나 싶었다. 그것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3번 가서도, 장쩌민(江澤民)은 4번 가서도 보지 못했다는 천지를 과연 볼 수 있을지 날씨가 걱정이었다. 저녁 먹으며 몇 잔 곁들인 중국술(白酒)이 감칠맛으로 유혹했지만 참고, 내일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 호텔에서 이틀 묵는다니 짐은 두고 작은 배낭만 메고 나왔는데, 아쉽게도 날이 잔뜩 흐렸다. 그런데 7시가 넘었는데도 머릿수가 모자란다며 출발을 못하고 있었다. 살펴보니 우리 일행 중 독방을 신청한 한시모임의 회장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면 이장님들이 혀를 찼다. 가이드와 함께 객실로 뛰어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가 후다닥 반바지에 반팔티를 걸치고 나오는데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우리와 술자리를 마치고도 기도하는 대신 누구랑 술을 더 마신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버스가 좁은 도로를 구불구불 흔들리며 가는데 결국 비가 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실망하며 입맛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늦게 타서 머리를 팍 숙이고 제일 뒤에 가서 앉았던 우리 한시모임 회장이 불쑥 앞으로 나가더니 가이드에게 마이크를 빌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어가지고, 주책없이 들떠서 술이 과해 폐를 끼쳤습니다. 날씨도 저 때문인 것 같아 더 송구합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백두산 날씨는 조선 처녀 마음 같아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꼭 천지를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만약 오늘 못 본다면 제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백만 원을 내놓겠습니다! 그것으로 식사를 업그레이드해서 최고의 음식을 맛보든지, 아니면 여러분 모두에게 드릴 선물을 사든지, 가이드와 의논하겠습니다. 아무튼 끝까지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수가 터졌고 차 안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조선족 가이드의 서툰 함경도 사투리가 더 구수해졌다. 4시간이 더 걸려서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칭하는 쟝바이샨(長白山) 매표소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입장료와 이중으로 갈아타야하는 셔틀버스 요금만으로도 엄청난 수입일 터였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흐렸다. 셔틀버스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아! 백두산만의 경탄스러운 경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서파코스 1442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 정상에 당도했을 때, 그곳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고 바람마저 좋았다. 우리는 행운아들이었다. 아~! 온전한 자태를 드러낸 흰머리(白頭)산과, 하늘빛 수면에 흰 구름 가득 담고 있는 하늘못(天池)이 하늘 아래 땅위에 솟아 있었다. 아! 이곳이구나! 이곳에 드디어 단군의 자손인 내가 왔구나! 가슴이 벅차다가 금세 먹먹해졌다.

  워낙 사람 많고 부산스러워 잠시라도 차분히 천지를 바라보고 앉아, 단군성조의 얼을 느끼고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을 느껴볼 짬은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간 태극기와 현수막은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천지에 손이라도 담글 엄두는 고사하고, 줄을 쳐놓고 그 안으로는 발도 딛지 못하게 경계가 삼엄했다. 옆에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표시하는 ‘37호 경계비’가 있는데, 그 너머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선처녀 마음이 금세 토라졌는지 삽시간에 구름이 몰려왔다. 맞은편 어디쯤이 남북 정상이 함께 오른 동파코스려니, 망연히 바라보다가 마음 한 자락 떼어놓고 쫓기듯 내려와 셔틀버스를 타야했다. 중간에 잠깐씩 내려 동양의 그랜드캐년이라는 금강대협곡과 쌍제자하, 고산화원 등 백두산이 품은 비경을 둘러보았다. 북파코스로 갔더라면 그 유명한 비룡폭포(장백폭포와 은선폭포)를 봤을 텐데 그건 좀 아쉽다.

  오랜 옛날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여 온 백두산은 개마산, 태백산, 불함산, 장백산 등으로 불리었고, 단군(檀君)께서 탄강하신 이 신령스러운 산기슭에서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조선의 신시(神市)가 여기였고, 백두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고구려, 백두의 줄기인 동모산 자락의 발해, 여진의 금나라, 청나라가 모두 백두산 기슭을 시원으로 한다. 청나라는 200년 동안 백두산 일대를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출입을 제한했을 정도다. 압록강, 두만강, 흑룡강, 송화강이 여기서 발원하여 헤아릴 수 없는 작은 강과 지천으로 뻗어나가 광활한 만주 벌판을 적시는 젖줄이 된다. 북한도 얼른 이 천혜의 자원을 개발하여 중국에 뺏기는 관광수익이라도 찾아야할 텐데.     

  백만 원이 굳은 한시 모임 회장은 술은 얼마든지 사겠다며 싱글벙글해졌다. 다음날은 우리가 국내성이라 부르는 고구려 옛 도성 지안(集安)으로 가서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과 장군총을 순례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를 광개토대왕의 긴 시호를 줄여 ‘호태왕비’라고도 부르는데, 비문에 고구려는 천손이 다스리는 나라로 고구려 지배의 당위성과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밝히며, 민족의 기상과 전망, 즉 ‘고구려천하사상’을 공표해 새겨놓은 대형 비석(높이 6.39m, 37t)이다. 사면 돌기둥 형태의 이 비석은 AD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건립했다. 비석의 사면에 빼곡히 적힌 1,775글자의 해독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용을 놓고 아직까지도 한‧중‧일 역사학계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몇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었지만 실체를 몰랐던 이 비석은 청나라의 만주에 대한 봉금령이 풀린 뒤에야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일본인이 먼저 비문을 입수하여 일본의 역사왜곡 꼬투리인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데 이용되기도 했고, 중국은 그들의 이면비석 문화와 전혀 다른 사면비석인데도 불구하고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바꾸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존재 한다면, 한민족의 통일은 비단 남북의 통일에서 나아가 이곳, 적어도 압록강 너머 민족의 발원지까지여야 한다면 지나친 국수주의적 발상일까? 천만에! 중국의 집요한 동북공정의 초점은 발해, 고구려, 고조선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던 황하문명을 2500여 년이나 앞지른 우리 선조들의 요하문명이 뒤늦게 발굴되자 그 전체를 겨냥하고 있건만…….

  호태왕릉과 장군총 가는 길은 드문드문한 농가와 황량한 옥수수 밭 사이로 난 두렁길을 지나간다. 한때 고구려의 국립묘지였을 이곳에 장군총 같은 피라미드와 고분이 수백 수천이었을 터인데 지금은 살펴봐야 손꼽을 정도의 고총이 밭 사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호태왕비는 비각을 중국식으로 만들어 사방을 유리로 막아 놓았고 감시원이 안에서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태왕릉은 도굴되고 훼손된 한참 뒤에 발견하여 일부나마 복구하였는지, 돌무더기 같은 작은 동산에 설치된 철제계단을 올라가니 작은 석실이 있었다. 중국 지폐가 널려있는 그 안을 보아도 도무지 광개토대왕의 능이라고 믿기 힘든 초라하고 방치된 모습이었다.

  나오는 길에 있는 허름한 단층건물에 ‘태왕비 태왕릉 전람실’이라고 현판이 붙어있어 들어가 보니, 불도 켜지 않고 청소도 되어있지 않은 얼룩진 벽에 이미 퇴색된 사진만 몇 장 붙어 있었다. 이렇게 최소한의 관리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2004년 이곳을 중국 소수민족의 유산이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놓고 입장료와 장사로 돈만 벌고 있다. 관광객은 거의 한국 사람들이니 우리가 호구인지 역사가 호구인지 괜히 또 씁쓸했다. 그 곁 철문 바깥에서 아주머니들이 쪼그려 앉아 ‘오이 천 원’, ‘장뇌삼 천 원’이라고 소리치는 서툰 한국말이 공허하고 애처로웠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장군총은 그나마 가는 길에 벽돌을 깔았고 전면에는 잔디를 모양 나게 잘 가꾸어 놓았다. 고구려 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사면의 방향을 동서남북으로 맞추어, 다듬은 화강석을 7층으로 쌓아올린 꽤 웅장한 모습이었다. 태왕릉과 무척 가까운 이 무덤은 대체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데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고 한다.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역량과 기개에 새삼 숙연해지며, 광활한 영역을 차지했던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가 된 이 여행이 고마웠다. 천하의 중심이었는데…….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어 두 번째 고구려의 도성인데 방어를 위한 환도산성을 배후로 두고 압록강을 서남으로 바라보면서, 산지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가 된다. 환도성에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많이 훼손되고 변형된 지금도 당시의 도시구획을 따라 집들이 들어서 있는 듯 보인다. 압록강 너머 북한 땅의 산야에는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국내성 부근의 초목과 산과 들과 강의 생김이 조금도 이국적이지 않고, 낯설지도 않아 우리 고향산천 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보트를 나눠 타고 압록강을 크게 휘돌아오면서, 저만치 보이는 북한의 학교와 정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보고 손을 흔들며 울컥하였다. 가이드 말로는 남한 관광객들이 보게 일부러 지어놓고 사람들을 동원했을 거라지만, 왠지 역사에 미안하고 선조에게 송구하고 애처로운 저 민초들이 안타깝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을까? 배에서 내려 맑지도 않은 그 강물에 들어가 발을 담그고 팔다리를 적실뿐이었다.

  점심 먹으러 간 북한식당 ‘묘향산’에서 북한의 처녀들이 공연하며 부르는 ‘고향의 봄’과 ‘두만강’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무대도 좁고 같은 아이들이 거듭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공연은 빈약하였지만, 한민족이라는 공감대로 인한 울림이 있었다. 우리는 입구에서 사서 무대에 건넨 꽃다발이 입구로 되돌아오면 다시 사서 또 건네고 그녀들과 사진을 찍었다. 손님에게 돈은 받지 않는다는 그들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방식이었다. 정작 돈이 될 국가적 사업이나 관광개발은 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젊은이들을 내보내 어설픈 공연으로 남쪽 사람을 울려 돈 벌게 하니 괜히 언짢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회갑을 넘긴 세대이니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생각은 젊은 세대와는 좀 다른 감정이 있으리라. 그렇더라도 남의 나라에서 느끼는 은근한 동족애는 사상이나 정치적인 문제와는 별개였다.

  압록강은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라앉혔을까!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우리 조국의 아픔 때문일까, 서슬이 풀어진 듯 연초록 물빛의 압록강(鴨綠江; 오리머리 빛깔 같은 푸른 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길고 많은 역사와 전쟁과 민초들의 이야기가 이 강을 따라 흘렀을까! 눈을 들어 건너편 우리나라 북녘 땅 벌거숭이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중국 4대 미녀 중 한나라 원제의 후궁이었던 왕자오쥔(王昭君)이 흉노로 시집보내져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읊었다는 시가 생각났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불운의 미녀 왕소군의 딱한 심정을 헤아려 ‘소군의 원망(昭君怨)’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특히 아래 두 구절만 유명해져서 오늘날까지 도처에서 회자되고 있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우리는 다시 6시간이 넘는 엉덩이 여행으로 심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다들 친근감이 생겨 버스 안에서도 많은 재담과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저녁 식사 후에 한시모임 회장이 대차게 쏜다며 앞장서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노래방으로 갔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는 중간 중간 돌아가며 이번 여행의 느낌을 말하는데, 누구는 재미를, 누구는 의미를, 누구는 감동을 말했다. 그때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차타는 시간이 길어 몸은 좀 힘들었을지라도, 조국과 민족과 역사를 생각하며 재미와 의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멋지고 특별한 여행이었다며 다들 즐거워했다.

  필자로서도 인생 제2막은 의미를 찾는 삶이 되도록 애쓰며 여행과 공부를 즐겨하는데, 그 어떤 여행보다 가슴 뿌듯하고 보람찬 여행이 되었다. 특히 늦은 나이에 함께 공부하는 벗님들과 한시를 배우는 즐거움도 홍복인데, 이런 뜻 깊은 여행을 함께하게 된 나는 행운아이다. 백두산과 천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압록강과 북녘 땅, 또 묘향산식당……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돌아온 집에서 잠들기 전에도, 한시모임에 나가서도, 지금도, 내내 가슴에 먹먹하게 남아있다. 부디!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우리나라 땅만 밟고 한라에서 백두까지 온전한 국토순례 할 날이 오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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