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지? 내일 비 온다니까, 오랜만에 광릉 수목원에 같이 갈래? 비 오면 피톤치드가 몇 배가 된대. 숲속에 앉아 빗소리나 실컷 듣자고…. 내가 예약할 테니, 그냥 툭툭 털고 우산이랑 깔개만 챙겨 나와.
뜻밖의 전화가 고맙기보다 뜬금없었다. 열어놓은 창밖은 바람 한 점 없이 우중충하였고, 책상 옆에서 갸웃거리는 선풍기 바람은 후터분하기만 했다. 기분은 날씨보다 더 가라앉아 작업에 집중을 못 하고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내가 만난 거래처 직원이 ‘코로나 확진자’가 되는 통에, 느닷없이 대상자가 되어 자가격리 기간이 끝난 지 사흘이 지났다. 재택근무를 연장하라는 회사 방침은 나를 더 의기소침하게 했고, 틀어져 버린 일과 울화가 자꾸 치받쳐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흔들곤 했다. 그런 나를 딱히 여긴 걷기 동호회 친구의 전화에도 심드렁하다가 피톤치드, 숲속의 빗소리란 말에 화들짝 옳다구나 싶었다. 마음이 바뀌자 나를 꺼리지 않고 손 내미는 친구가 어둠 속의 불빛 같았다.
날씨는 일기예보를 놀리듯 화창했다. 친구 차로 의정부를 지나 포천으로 가는데, 새삼 창밖의 세상이 낯설게 보였다. 나를 도사리인 양 내팽개쳐놓고도 세상은 딴청 부리듯 눈길도 주지 않고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런 증상도 없는데, 대번에 눈길이 달라진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죄인이 되었고 격리는 형벌이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브리핑은 해보지도 못하고 기회를 잃었다. 친구는 천연스레 내 상념을 부수며 너스레를 떨었다. 누구 알지? 많이 아프다네. 누구는 시골로 이사 갔어. 누구는 죽었고…. 한때 다정히 함께 걷던 사람들 소식에 나는 짐짓 눈을 크게 뜨거나 입을 쩍 벌려주었다. 걷기는 애틋한 취미지만 딴 일에 밀려 소홀해져 버렸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필요가 이어지지 않으면 잊거나 잊히고 마는데, 친구의 살가운 말 한마디가 가교가 되어 정답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저게 씨앗으로 염주를 만든다는 모감주나무야. 지난주에 하늘공원 갔더니 가로수가 저 나무여서 공중에 온통 노란 이불을 펼쳐놓은 듯 장관이더라. 여기는 지금 원추리랑 비비추랑 옥잠화가 한창일 거야.
겹겹의 초록이 반짝이는 칠월의 숲에 들어서자 달큼한 향기가 몸을 휘감았다. 1997년에 국립수목원으로 승격되었다는데, 언제 왔었는지 기억도 아득하니 어딜 봐도 생소했다. 각양각색의 식물이 자태를 뽐내는 사잇길로 들어서자, 어깨를 두드리는 햇살과 가슴까지 적시는 내음에 몸과 마음이 둥실 뜨는 듯했다. 친구는 자주 설명이 적힌 팻말을 들여다보며 맞아, 이거야! 이것 좀 봐! 해가며 내게 일러주었다. 나무 그늘의 쉼터에서 마스크를 벗고 팔을 오르내리며 깊이 숨을 쉬니 공기 맛이 감미로웠다. 매미와 쓰르라미의 합창에 새소리가 거들고, 산들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그림 속에서 물결처럼 번졌다. 화가 들어차 지글지글했던 머릿속에서 꼴꼴꼴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슬며시 웃었다.
친구가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들더니 숲 해설사에게 들었다는 단풍나무 얘기를 해주었다. 단풍잎이 다섯 갈랜 줄만 알지? 아니래. 세 갈래, 일곱 갈래, 아홉 갈래, 열한 갈래가 있대. 각각 다른 이름도 있어. 고로쇠나무는 다섯 갈래나 일곱 갈래고, 열한 갈래가 애기단풍이래. 그때부터 단풍나무 잎을 유심히 보니 아홉 갈래와 일곱 갈래는 많은데 되레 다섯 갈래가 더 뜨이지 않았다. 친구는 다른 나무와 꽃에 대해서도 조근조근 얘기해줬는데 금세 헷갈렸다. 단풍나무도 그러려니와 이름 모를 나무들과 꽃들 모두 각각 제 모양을 이룬 까닭이 있을 테지만, 그 섭리를 사람이 다 알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이제나저제나 내 속에 눌린 억울함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짬을 노렸는데, 아무래도 모처럼 누리는 자연 속의 상쾌함을 깨뜨릴 것만 같아 마른침만 거듭 삼켰다. 내 울분을 듣고 친구가 맞장구치며 다독여주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입꼬리를 당기는 내 속을 알 리 없는 친구가 눈을 치뜨며 “다 좋은데, 비가 안 와 좀 아쉽네…” 하는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남빛 하늘에 솜구름이 뭉실뭉실 놀리는 듯해 저절로 픽 웃음이 나왔다. 식물원을 천천히 둘러보고 본관으로 가니 마침 비비추 그림 전시회 중이었다. 그림들이 어찌나 세밀하고 생생한지 눈이 동그래졌고, 비비추의 종류가 그렇게나 많은지 입이 헤 벌어졌다.
수목원을 크게 도는 산책로에서도 친구는 아는 사람들 얘기를 곰살갑게 이어갔다. 산책로가 끝나고 ‘육림호’로 갈 때, 놀랍게도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호수 건너편에는 햇빛이 그대로여서 여우비려니 했는데, 금세 어두워지며 콰콰쾅! 소리와 함께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들큼하게 일어나는 흙냄새에 마음이 먼저 달떠 올랐다. 츠츠츠츠츠 나뭇잎이 소스라치는 소리, 셀 수 없이 생기고 겹쳐지는 수면의 동그라미는 보이는 소리였다. 촐랑촐랑 파닥이는 잔물결, 물보라 속에 갸웃대는 꽃들, 허공을 사선으로 채운 빗줄기…. 뿌예진 농담이 춤추듯 흔들리며 생동하는 수묵화 속에 들어서서, 흠뻑 젖은 채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그때, 내 안에 쌓였던 둑이 터져 콸콸콸콸 쏟아졌고, 쏴아아 가슴이 씻겨 나가며 좀체 느끼지 못할 향기롭고 싸한 맛과 색이 오감으로 들어와 온몸에 번졌다.
그대는 과연 덕을 많이 쌓았나 보다! 그러니 하늘이 그대 말을 듣고는 바로 비를 왕창 쏟아주었지. 덕분에 내가 큰 기쁨을 누렸네!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시공의 터널이랄까, 참으로 신비하고 황홀한 순간이었어!
벅찬 여운이 실린 내 말에 친구는 말갛게 웃었다. 기적 같았던 소나기가 그치고 먹구름도 마술처럼 사라졌다. 다시 나온 해가 장난친 아이처럼 열없이 웃었다. 길은 개울처럼 물이 철철 흘렀다. 수목원에서 가까운 봉선사가 기억나 가보자고 하였는데, 역시 옛 모습과 새 모습이 뒤섞여 분간이 어려웠다. 연꽃 축제를 준비하는 연못에는 하늘을 우러르며 연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 위에 청홍색 등이 줄지어 흔들렸다. 산턱에 걸린 해가 못다 한 말들을 하늘가에 붉게 흩뿌려 놓고 소나무 사이로 남은 빛살을 방사할 때, 봉선사에서 두두둥 법고 소리가 울렸다. 공명이었을까, 내 안에서도 텅텅 소리가 울렸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는 까닭이 잡힐 듯 아른거렸다. 모든 존재가 알지 못할 이치 속에 있다는 귀띔이 아련히 들렸다.
현상의 까닭은 다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괜한 운수를 탓하며 가슴만 쳤던 내가 바보 같아 쑥스레 웃었다. 안팎으로 꼭꼭 갇혔던 나를 친구가 불러내었고, 숲속을 거닐며 다 다른 꽃과 나무들의 생김새를 보았다. 숲과 호수에 소나기가 쏟아질 때, 나는 저절로 삼매에 빠져 정화를 체험했다. 혼자 층층이 쌓았던 생각들이 천둥과 빗줄기에 쓸려나가고 환한 햇살이 비쳤다. 굉장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또 벙그레 웃음이 나왔다. “왜 자꾸 웃기만 하니?” 빤히 눈을 깜빡이며 덩달아 웃는 친구 얼굴이 환했다. 내겐 이런 친구가 있고, 하나가 틀어졌을지라도 그걸 딛고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소나기에 어느 가지가 부러지고 어느 꽃이 떨어졌겠지만, 씻긴 나무와 숲은 물기를 머금어 더 맑고 푸르게 빛났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2022년 문학창작지원금 선정 작품(부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