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사라져도 죽지 않는다. 가슴에 새겨진 한 그루 소나무, 늘 그대로 푸르다.
멍든 마음을 달래려 홀로 산에 오르던 그 날, 나무가 나를 불렀다. 문득 바람이 아닌 공기의 떨림, 벌레의 숨소리 같은 무엇이 주위를 돌아보게 했고, 등을 떠밀듯 등산로에서 저만치 우뚝 선 소나무에 다가서게 했다. 멍히 바라보다가 산행 때 가끔 하던 대로 인사를 건네며 안아주었다. “안녕? 여기서 나 기다렸구나! 반가워…” 순간, 찌릿! 전해오는 느낌이 숱하게 나무를 안아 본 다른 때와 달랐다. 정수리로 지잉지잉지잉지잉… 여린 파동이 들렸고 맥박이 소리를 내며 빨라졌다. 나무가 끌어당겨 내가 안긴 듯했다. 아연하여 살짝 떨어져 새삼 올려다보는 그때, 낮게 드리웠던 구름이 휘릭 걷히면서 빛살 더미가 화르르 쏟아져 내렸다.
주위가 투명한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얼결에 함께 빛기둥 속에 든 나도 환해져 입이 헤 벌어졌다. 신기한 나무를 간직하려고 휴대전화로 위로 엇비슷이 찍고, 밑동에서 위를 향해 또 찍었다. 두 번째 사진에 웬 붉은빛 덩어리가 심장처럼 나무 가운데에 둥실 걸려 있어 눈이 동그래졌다. 다시 나무를 안는 내 심장이 콩콩거렸다. 나무와 나의 밀애는 빛이 조화를 부린 이 사진이 증표가 되었다. 그때부터 ‘솔랑’이라 이름하고 틈만 나면 찾아갔다. 보듬고 생각하고 기대어 얘기도 나누면서 점점 서로의 가슴이 열리고 감응이 일어났다. 행운이 그렇듯, 이 영험한 소나무는 꿈처럼 사라져버렸는데, 알고 보니 내 안으로 자리를 옮긴 거였다.
집에서 가까워 무시로 올랐던 불암산, 수없이 같은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솔랑을 눈여겨보진 못했다. 숱한 나무들처럼 그저 그런 배경이었다. 동네의 소음이 아련해지는 어름, 옹색한 남새밭 끝머리 둔덕에, 솔랑은 키 작은 잡목들과 어울려 형님처럼 쑥대머리를 휙휙 넘기며 솟아있었다. 솔랑은 볼수록 멋스러웠고 만날수록 정감이 느껴졌다. 며칠만 지나도 보고 싶었고 기다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꼭 껴안으며 겉을 통해 속으로 교감하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수풀을 걷어내고 앉아서 기댈 자리도 만들었다. 아무리 햇살이 좋고 각도를 이리저리 해봐도 나무의 심장이 밖으로 나온 사진은 다시 찍히지 않았는데, 그건 이미 중요치 않았다.
솔랑과 포옹할 때는 몸을 바짝 밀착시켜 한쪽 다리로 붙어서서 한쪽 다리는 둥치를 감는다. 양팔로 감싸 안고 한쪽 뺨을 붙인 채 고개 들어 우듬지를 올려다본다. 솔랑이 뿌리에서 끌어올려 잔가지와 솔잎으로 허공에 그리고 써놓은 말들이 펼쳐져 있다. 그림은 바람에 나부끼며 말하고 구름과 놀면서 말한다. 새와 벌레들이 노래하며 맞장구를 친다. 그 자세로 잠깐 있는 정도로는 솔랑의 말이나 몸짓을 알아채지 못한다. 순수한 마음과 체온을 전하며 정신을 다잡으면, 드디어 가녀린 소리와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온다. 그렇게 화답이 오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문이 열린다. 거기 들어서면 양수 같은 수액에 젖어 들며 몸과 마음이 말개진다.
날로 더 몰입하던 어느 때, 아슴푸레하던 신호가 대뜸 말이나 생각이 되어 뇌리에 쑥 들어온다. 그 토막말이나 단상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또 그게 당장 뚜렷한 대화나 의미로 연결되진 않는다. 그러면 나도 그냥 솔랑에게 얘기를 주절거린다. 우리는 왜 지금 여기서 이 모습으로 만났을까. 앞가림에 급급한 내가 놓치는 섭리를 일깨워주려는 걸까. 바로 답을 듣지 못해도 사람과는 쉽잖은 ‘가슴으로 통하는 울림’을 느낀다. 갇힌 일상에서 벗어나 솔랑에 기대어 고즈넉해지면, 묻기라도 한 듯 지나간 사랑과 잘못이 떠오르기도 한다. 못내 원망했던 상대와 상처들마저 솔랑은 그리움이 되게 하고, 질투는커녕 더 많은 사랑을 하라고 부추긴다.
솔랑의 수액에 가슴을 적신 나는 전과 확연히 다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표정이 밝아졌다. 술에 취해 올라가 얼싸안고 울다가 웃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텐트를 가져가 책도 읽어주고 곁에 옹그려 자기도 한 뒤의 변화였다. 솔랑은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서로 멍들게 했던 동업자와 정리가 되었고 일은 더 바빠졌다. 솔랑을 잊는 날들이 많아져 사진을 보며 미안해했다. 몇 달이나 못 가본 그해 장맛비 쏟아지던 여름날, 왠지 뒤숭숭하고 안달이 나서 부랴부랴 올라갔더니 솔랑은 흔적도 없었다. 나는 흠뻑 젖은 채 동동거리며 동네를 수소문했다. 가끔 밭일할 때 마주쳐서 인사를 하면 대꾸도 안 하던 노인을 물어물어 찾아냈다.
자기 땅도 아닌 그 밭을 넓히려 파내버렸다니! 나는 풀썩 주저앉았다. “거기다 수목장을 한 당신 잘못이지!” 되레 엉뚱하게 나를 나무라는 무지렁이 노인의 멱살이라도 잡으려는데, 불쑥 눈앞에 떠오른 솔랑이 말렸다. 한동안 억장이 무너져 밭에다 해코지라도 해버릴까 싶을 때도, 솔랑이 고개를 저었다. 하염없이 솔랑의 사진을 쓰다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머릿속에 말이 들렸다. ‘생명은 죽지 않아, 변할 뿐이지’ 어, 뭐지? 곱씹는 사이 ‘사랑도 마찬가지야’ 대답하듯 또 울렸다. 솔랑이었다. 말은 뇌리에 문장으로도 촤라락 펼쳐졌다. 가슴으로 빛기둥이 내려왔고, 그 안에 우리가 있었다. 그때부터 겉이 필요치 않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솔랑은 내 머릿속에 글을 쓴다. 전에 미진했던 뜻이 반추되기도 하고, 때로 꿈에서도 이어진다. 나무는 머리를 땅속에 두어 편안하고, 뭇 생명과 저절로 통한다고 한다. 그럼, 사람은 머리가 들려 있어 머물지 못하고, 자리다툼에 부대끼다 쓰러질까? 내가 생각하니, 어느 쪽도 거꾸로는 아니라 한다. ‘거꾸로’나 ‘바로’는 비교로 생기는 사람 세상 말이고, 생명 세계에는 나름의 ‘흐름’이 있을 뿐이라 한다. 사람들은 ‘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가지려 하고, 더 만들어내서 흐름이 엉킨다고 한다. 솔랑의 말들을 적어 책을 만들까 하니, 잔설을 터는 모습으로 솔랑은 손사래를 친다. 자연을 보고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책이 필요 없다고 한다.
사랑은 그리움이 된다. 언제 어디서 또 문이 열릴지, 기다림은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