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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석 Oct 10. 2022

한강의 "채식주의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연재소설입니다. 1부 “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 3부 “나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채식주의자”를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서 독해해보겠습니다.      


     

1. 채식주의자      



1) 남편과 영혜의 연애와 어떤 징후      


남편이 영혜를 만나는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영혜가 세련되었거나 매혹적인 부분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영혜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개성 없고 단순한 옷차림, 모나지 않은 성격이 그를 편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 때문에 그는 연애하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그녀 앞에서 위축감이나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영혜는 결혼해서도 아내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나갔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의 아침밥을 준비하고, 출근 배웅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가사 경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며 무난한 결혼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혜에게는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혜는 브래지어가 가슴을 조여와 입을 수 없다며, 외출할 때도 조끼를 겹쳐 입는 것으로 브래지어를 대신하였습니다. 저는 영혜의 이런 행동을 일종의 증상(징후)으로 보았습니다.


증상(징후)이란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증상은 처음에는 비집고 나온 흐릿한 얼굴이기에 개인이든 사회든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두꺼운 층위로 솟아 올라와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사후적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증상이 어느 정도 모습을 나타내는 2부 “몽고반점”과 3부 “나무 불꽃”의 내용을 가져와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영혜의 행동은 상의 옷을 입지 않고, 맨몸으로 있는 것을 즐겨하며, 2부 “몽고반점”에서 자연과 일체가 되려는 듯 꽃을 몸에 그리고, 3부 “나무 불꽃”에서는 음식을 끊고 나무처럼 물만 마시며 광합성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의 첫 증상이 영혜가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증상의 온전한 모습은 “나무 불꽃”에서 영혜가 대지를 받치는 나무가 되려 몸을 변화시키는 모습(음식 거부, 물구나무, 죽음)입니다. 이 상징에 대한 해석은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영혜의 평범함에 대하여 이야기를 조금 첨가하겠습니다. 남편이 영혜를 평범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가족 구성원이나 사회가 부여한 관념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적응하고 순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가족이나 사회와 부딪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것을 남편은 평범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영혜에게 존재하는 잠재적 힘(증상)이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요.  


         

2) 영혜가 꿈을 꾸게 된 계기와 꿈의 상징      


소설 채식주의자는 꿈을 꾸면서부터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꿈에 대하여 바로 들어가기 전에 영혜에게 꿈을 꾸게 한 사건부터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꿈을 꾸게 한 사건이 영혜의 무의식을 자각시킨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그녀의 꿈을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꿈을 꾸게 된 계기를 알아보고, 두 번째는 영혜의 무의식적 자각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세 번째는 꿈이 상징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영혜에게 무의식적 자각을 가져오고, 악몽을 반복하게 만든 사건은 영혜가 늘 아침에 해오던 남편 아침밥을 차려주면서 발생합니다.


영혜는 남편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높은 언성과 재촉에 손놀림이 바빠져, 급하게 얼어붙은 고기를 쓸다 보니, 식칼은 이가 나갔고, 영혜는 손가락을 베개 됩니다. 허둥대며 영혜는 아침상을 준비하였지만, 남편은 영혜가 준비한 불고기를 먹다가 입에서 칼 조각을 뱉어냅니다. 남편은 소리쳤습니다. “그냥 삼켰으면 어쩔 뻔했어! 죽을 뻔했잖아!” 다음날부터 영혜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럼, 왜, 이 사건이 꿈을 꾸는 계기가 되었던 걸까요.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세계가 나를 상처 입혔고, 그 세계에서는 나도 누군가에게 칼날이 된다는 것을 무의식의 층위에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영혜가 순종해왔던 세계가 실제는 자신에게 피를 흘리게 했으며, 자신도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압축적 사건을 영혜의 무의식이 만난 것입니다.      

    

두 번째, 아침밥을 차려주면서 생긴 일이 자극한 영혜의 무의식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3부 “나무 불꽃”에 나오는 문장을 빌려와 말한다면 무의식적 자각은 ‘땅을 받치고 있는 나무’에 대한 깨침을 말합니다. 여기서 나무는 대지에서 영양분을 제공받는 나무가 아니라, 대지를 즉 세계가 생성할 수 있게 떠받치고 있는 나무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생성(생명 지속)시키는 신화적 힘을 가진 존재 말입니다. 영혜는 그런 나무와 같아지려 음식을 끊고, 나무처럼 물구나무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나무처럼 대지를 바쳐주기 위해서요. 저는 이것이 영혜의 무의식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조여 오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려는 잠재적 힘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영혜의 꿈이 상징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꿈은 오싹하고 두려운 느낌이며 피의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피의 이미지는 폭력적 해결이 하나의 규칙으로 통용되는 세계의 오싹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채식, 몽고반점, 나무가 되려는 것과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 이미지를 발산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무자비한 힘으로 영혜의 채식을 해결하려 하고, 베트콩을 죽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아버지.      


이 이미지를 아주 잘 표현한 것이 개 이야기입니다. 물림과 그에 대한 해결로써 죽임 그리고 그 육신을 먹어치워 버리는 방식. 조금 자세히 인용해보자면, 아버지는 어린 영혜의 다리를 물어뜯은 개를 오토바이에 묶습니다. 오토바이는 개가 입에 거품을 물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졌고 어린 영혜도 밥을 한 그릇 국에 말아먹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든 그 순환의 고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리 안에서는 나의 행위가 누군가를 죽이게 되고, 누군가에 의해서 나도 죽어갑니다.      


그래서 책에서는 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p 37)          



3) 남편 회사의 사장이 초대한 부부 동반 모임      


남편은 회사에서 직책이 과장인데 상무, 전무, 부장 부부들을 초대한 사장 주최의 연회에 초대받습니다. 남편은 사장 주최 연회에 과장급을 부른 것은 자기가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회사에서 크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장의 집에서 음식이 서빙되어 나오는데 영혜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영혜의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라는 말이 주위의 시선을 모으자, 남편은 건강상의 문제로 부인이 채식을 한다고 말로 변명을 합니다. 그 이유를 듣게 된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채식을 주제로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계속해서 서빙되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는 아내의 존재가 모임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참석자들은 점점 영혜가 존재하지 않는 듯 서로 간에 대화를 이어갑니다. 남편은 내심 걱정을 합니다. 자신의 상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인이 소외되어 낯선 자로 인식되듯이, 자신도 회사생활에 찍혀서 소외되고 낙오될까 봐.      


그러나 회사에서 남편이 성사시킨 프로젝트가 괄목할 만한 수입을 내자 모든 것이 묻힙니다. 회사는 자본의 확장에 기여하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의미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그 공동체의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아버지의 행동, 개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가 자신에게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텍스트를 보면 남편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아내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있을까. 저 중년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걸까. 순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p33)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 갔다.”(p25)   

   

남편이 연애 시절, 영혜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을 유혹으로 받아들였듯이, 영혜의 채식은 남편뿐 아니라 연회의 참석자에게 알길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들어본 적 없는 까마득히 깊은 함정 같은 거였습니다.           


4) 영혜의 자해와 입원     


영혜의 남편이 가족들에게 이리저리 전화로 영혜의 채식 이야기를 하여, 가족들은 이사한 언니 집에 모두 모이게 되는 기회를 만듭니다. 그 자리에서 영혜의 언니, 남동생, 부모님 모두가 영혜의 채식을 금지시키려 하는데, 영혜는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하며 거절합니다. 가족들의 설득과 협박이 통하지 않자, 아버지는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자기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들에게 영혜를 붙잡게 하고 손으로 탕수욕을 집어 강제로 영혜에게 먹이려 한 것입니다. 힘에 부쳐 몸부림치던 영혜는 입으로 짓이겨 들어오는 고기를 더 이상 막지 못하자 칼을 들어 자해로 상황을 종결짓습니다. 여기서 잠깐 등장하는 언니의 남편 이야기를 간단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언니의 남편은 2부 “몽고반점”에서 ‘그’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영혜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하여 저항의 몸짓을 보인 것은 ‘그’ 뿐이었고, 영혜를 응급 처지를 하여 병원으로 데려간 것도 ‘그’입니다. 이 이야기는 2부 “몽고반점”과 연관되니 그때 가서 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시 자해의 장면으로 넘어오면, ‘그’는 피가 쏟아지는 영혜의 손목을 지혈한 후 그녀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향합니다. 영혜는 입원을 하였습니다. 엄마는 딸이 말라 가는 것이 너무도 안쓰러워 흑염소 약을 한약이라고 속여 영혜에게 먹이려 하지만 영혜는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토해버립니다.  

    

이를 보고 엄마가 딸을 향해 말합니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p 60)    

 

엄마가 절규하듯 외친 이 말,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는 앞에서 한 말들을 인용해 풀어본다면 네가 아버지의 질서를 거부한다면, 자본이 만든 운영원리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누군가에게 물리면 죽임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너를 소외시키고 결국은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만들 것이라고 의미입니다.           



5) 아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죽은 동박새


병실에 함께 있던 남편이 잠을 깨서 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급히 영혜를 찾으려 밖으로 나갑니다. 분수대 옆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기에 가까이 가 봅니다. 아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여윈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시공간에 살지만 세계를 얽어내는 방식이 다릅니다. 세계를 경험하고 느끼는 몸이 다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관성의 힘이 있어 남편은 영혜에게 다가갑니다.      


“나는 마치 타인인 듯, 구경꾼들 중의 한 사람인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쳐 보이는 아내의 얼굴을, 루주가 함부로 번진 듯 젖은 입술을 보았다. 물끄러미 구경꾼들을 바라보던, 물을 머금은 듯 번쩍거리는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p 64)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차마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p 64)     


아내를 보니, 아내 손에는 포식자에게 뜯긴 듯 피 흘리며 죽은 작은 동박새가 쥐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문단입니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 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p 65)     


이 마지막 문단은 남편이나 구경꾼들의 시야로는 영혜가 작은 생명을 죽인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혜를 생명의 질서에 혼돈을 주며 오염시키는 존재로 보는 것이죠. 그러나 영혜의 문맥으로 보았을 때, 죽은 동박새는, 포식자에게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자신이었습니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저의 개인적 해석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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