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남자의 연애 일기장 #. 03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력서를 작성해야 한다. 인생엔 여러 이력서가 있다. 대표적으로 소개팅이 그중 하난데, 이게 참 묘하다. 나이와 직장, 외모를 더불어 지원서에 기술하면, 서류 전형 결과가 나온다. 소개팅 서류전형에 통과하면 면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첫 면접에 통과하면 심층면접도 볼 수 있다. 물론 나 또한 면접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내 나이 서른, 그 당시 나는 첫 소개팅을 해볼 기회가 생겼다. 가족일 뻔했던 그녀와 헤어지고 3개월 만이다.
낯선 여성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이미 서류전형은 통과했기 때문에 면접 볼 기회는 있던 게다. 잘 보이지도 않는 프로필 사진을 기울여도 보고 회사 점심 시 시간에도 한 번 열어본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레스토랑 분위기를 찾기 위해 틈틈이 검색했고 식사는 최대한 가볍고 이빨에 고춧가루가 스며들지 않는 음식으로 선별했고 심사했다. 부기가 최대한 빠질 저녁시간으로 예약하고 길지도 않은 키를 늘려보겠다고 굽 있는 신발도 신고 장만했다. 예상 가능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공부를 이렇게 철저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똑같았을 것이다. 서른이 된 나는 더 이상 시간낭비하기 싫었다. 장기 연애에 질려버린 탓에, 좋은 사람을 만나 빠르게 결혼하고 싶었다.
거사 당일 싱그러운 경칩날 저녁이었다. 나는 삼십 분 먼저 도착해서 레스토랑 지형지물을 살폈다. 메뉴판은 재료까지 분석이 끝난 상태다. 혹여나 술을 먹게 될까 봐 대리도 알아봤다. 왠지 차를 끌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였는지 돌이켜 후회를 삼켜본다면,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한 맘도 있었을 테지만, 격식 있게 상대방을 존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간 제사 때마다 열심히 공을 들인 것이 빛을 바란건지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여성이 나와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연인으로 발전했다.
여자친구는 항상 내게 버릇처럼 말했다.
“왜 이렇게 잘해줘?”
“눈치가 정말 빠른 것 같아”
“여자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는 거 같아”
그도 그럴 것이 20대 전부를 유별난 한 사람과 만났으니 매너지수가 높은 편이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녀에게 세팅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물론 여성에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와는 성격도 잘 맞고 경제관념도 잘 맞는다. 운동도 같이하고 건물을 사기 위해 임장도 같이 다녔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으면 즉흥적으로 공항으로 출발하면서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무척이나 행복했다.
2년 전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지만, 알다시피 사람이 무언가에 빠지고 미치면 주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면 장기 연애를 하면서 새로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보다 속사정을 잘 알았던 그녀와 헤어진 지 불과 3개월, 내 그릇에 그 사람을 비워내고 새로운 상대를 채울 준비가 됐다고 믿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지금의 그녀와 나, 사람이
참 간사한 동물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새로운 문제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