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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우유에 대한 기억

흰 우유는 못 먹었지만....키는 작지 않습니다.

by 김인철

요즘 장을 보러 마트에 가면 가장 먼저 체감하는 것이 식료품값이다. 빵, 우유, 달걀, 채소까지 안 오른 것이 없다. 특히 우유 가격이 또 올랐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중학교 시절 반 친구들이 매일 먹던 흰 우유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홀어머니가 삼 형제를 키우셨다. 논밭 하나 없는 시골 살림에 어머니는 매일 품을 팔아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셨다.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단 한 번도 우유를 신청해서 먹지 못했다. 반 아이 마흔 명 가운데 서너 명만 빼고 모두가 흰 우유를 신청해 마셨다. 학교에서 매일 흰우유를 마시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우유를 싫어하거나 질려서 버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운동장이나 화장실 바닥에 흰 우유가 쏟아질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까운데. 안 먹고 버릴 거면 차라리 나 주지…"


특히 딸기우유나 초코우유가 나오는 날이면, 혼자 침만 삼키며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학교 우유 먹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유를 먹고 싶다고 말해봤자 돌아올 대답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형도,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야 매일 우유를 마실 수 있었다.


내 청소년 시절의 결핍은 우유만이 아니었다. 새 옷, 새 신발, 새 장난감, 새 문제집…. 하늘 아래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추운 겨울날 버스 정류장에서 팔던 50원짜리 어묵조차 내겐 결핍의 상징이었다.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이런 허기는 채워질 줄 알았다. 적당한 결핍은 한 사람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난한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싫은 이유를 하나씩 대며 일부러 외면했다. 하지만 그런 의도된 외면은 어른이 되었어도 성장기 소년에게 결핍이 주던 상처를 아물지 못하게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리 맛있는 어묵을 사 먹어도, 어린 시절 오십 원이 없어서 남이 먹던 어묵국을 구경만 하던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다. 배는 불렀지만 괜찮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우유정도는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학창시절 반 친구들이 우유를 먹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던 장면은 여전히 결핍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유를 한 잔 이상 마시면 속이 불편했다. 어릴 때 이 사실을 알았다면 흰우유를 먹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안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은 다르니까.


내게 학창 시절의 흰 우유는 단순히 영양을 제공하는 먹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 없었던 것, 갖고 싶었지만 늘 포기해야 했던’ 것들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필요한 물건을 살 때면 늘 신중하다. 정말 필요한지, 사고 나서 후회하지는 않을지 몇 번이고 따져본다.


이런 소비 성향을 보이는 이유는 절약 정신 때문만은 아니다. 학창 시절의 여러 결핍이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지금도 필요한 물건을 살때 몇번을 곱씹어 보게 된다. 요즘 젊은 세대가 한정판 운동화나 값이 나가는 신상을 망설임 없이 사는 모습을 보면 과감함이 부러우면서 낯설다. 나에게 소비란 여전히 치열한 계산과 자기 검열을 통과해야만 허락되는 행위다.


편의점이나 마트 진열대에 가득한 우유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학창 시절 친구들이 흰우유를 먹던 교실의 풍경을 떠올린다. 성장기 소년의 흰우유를 향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핍이다. 모든 것이 부실했지만 먹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이 가장 크다. 우유를 먹지는 못했지만 내 키는 179센치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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