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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시에 세탁기를 돌리는 남자

by 김인철

이 글은 꽤 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재활용센터에서 구입한지 십년도 넘은 그 중고 세탁기는 지금도 씽씽 잘 돌아갑니다.


지금 여기, 새벽 두 시에 세탁기를 돌리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새벽 두 시에 세탁기를 돌리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우선은 그가 낮에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쁘다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서 누군가 대신 세탁기를 돌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튼 그는 종종 새벽 두 시에 세탁기를 돌리곤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남자가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세탁기 자신이 스스로를 돌리는 것이다. 그 남자가 하는 일이라곤 세탁기에 전원을 넣어주고 일정량의 세제를 넣은 다음 코스, 세탁, 그리고 탈수가 표시된 버턴을 차례대로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PIXABAY


세탁기에 어느 정도 물이 채워지면 세탁기는 웅웅 거리며 서서히 그 속에 담긴 빨래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남자는 모두가 잠든 새벽 두 시에 라디오를 켜거나 텔레비전 채널을 1번부터 254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돌리거나 한다. 그리고서 맘에 드는 채널을 하나 고른 다음 그 화면이 보여주는 야하거나 현란하거나 지루하거나 감동적이거나 괴팍스러운 장면을 한동안 응시한다. 남자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안 하품을 두 번한다. 한 번은 작게 한 번은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크게, 그러는 사이에 세탁기는 첫 번째 세탁을 마친다. 쏴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세탁기는 세탁물에 오염된 물을 배수구에 마구 쏟아낸다. 그런 다음 세탁기는 자신의 온몸을 가능한 한 빠르게 회전시킨다. 세탁물에 남아있을 오염된 물의 찌꺼기를 가능하다면 무의 상태로 날려 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남자는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한 페이지도 들추지 못하던 책을 펴 든다. 일몰 직전의 태양과 검푸른 바다를 훔친 책의 표지는 상당히 세련되었다. 새빨간 김치 국물 두 방울이 태양 옆에서 느슨하게 번져 있다. 손때 묻은 첫 번째 페이지를 편다. 몇 번쯤 들어 봄직한 작가의 말은 다분히 상투적이다. 그렇지만 남자는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는 세탁기의 탈수 소리 때문에 온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 남자는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남자는 책을 덮어 버리고 불을 끈다. 남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한다. 드르륵, 드르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남자는 두 눈을 깜빡거리고 드르륵 거리는 세탁기의 탈수 소리는 더욱더 커다랗게 들려온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세탁기의 탈수 소리를 듣는 동안 오후의 일들을 생각한다. 남자는 오늘 저녁 광화문을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 남자의 뒤를 이어 연로하신 할아버지 두 분이 버스를 탔다. 할아버지 한 분은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두 할아버지가 한 의자에 앉는다. 뭔가 불만에 가득한 운전기사가 할아버지 중 한 분을 부른다. “할아버지 요금 얼마 냈어요?” 당황한 할아버지 미적미적 거리며 대답을 못한다. “할아버지 요금 얼마 내셨냐니까요?” 할아버지 얼굴이 벌개 진 채 여전히 대답을 못한다. 운전기사 한 번 더 그 할아버지를 채근한다. 나도 긴장하고 승객들도 긴장한다. 할아버지 마침내 입을 연다. “이천 원요.” 운전기사가 말한다. “할아버지 천 원만 내시면 되거든요.” 남자와 승객들은 운전사에게 배신을 당했다. 하지만 유쾌한 배신이었다.

이제 세탁기는 두 번째 세탁을 위해서 깨끗한 물로 자신을 턱밑에 까지 채운다. 세탁기는 물이 어디까지 차야 숨이 막힐까? 쏴아아. 남자가 세탁기의 파워 버튼을 누른 후 정확히 삼십 분이 흘렀다. 이제 세탁기는 자기가 할 일의 절반을 끝낸 것이다. 쏴아아 하는 세탁기의 폭포수 같은 물소리(밤이라서)를 들으며 남자는 다시 무한한 시간의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신호등은 파랗고 빨갛다. 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는 길을 건너면 안 된다. 남자는 파란불이 아니면 길을 가로질러 본 적이 없다. 휴지통이 없으면 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린 적도 없다. 남자는 영화표나 기차표를 끊을 때도 반드시 줄을 서서 끊었고 거리에나 전철에서 거지를 만나면 꼬박꼬박 오백 원씩 건네주었다. 남자가 말한다.


“그런데 난 왜 이토록 외롭고 쓸쓸한 거지?”


남자는 어쩌다가 일기예보를 듣지 않고 외출하면 흠뻑 비를 맞았고 어쩌다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나가면 꼭 테이블 없는 식당을 찾게 되고 어쩌다가 핸드폰을 놓고 나가면 중요한 전화가 몇 통씩 와있고 어쩌다가 지갑에 돈이 없는 날은 1인분에 9,000원짜리 삼겹살이 먹고 싶었다. 그런 날은 핸드폰도 놓고 나왔다. 제기랄, 어쩌다가, 어쩌다가, 어쩌다가 말이다. 머피의 법칙을 풀어내는 수학 공식은 어쩌다가 일지도 모른다.

이제 세탁기는 마지막 세탁을 위해서 쏴아아 하는 폭포수 같은 소리를 내며 조금은 덜 오염된 물을 배수구로 마구 쏟아 내린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번의 세탁과 한 번의 배수와 한 번의 탈수, 그렇지만 남자의 상념 속엔 한 번의 유쾌한 웃음과 두 번의 성냄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허무함이 남아 있었다. 쏴아아. 세탁기 안으로 폭포수 같은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린다. 치치카카, 치치카카. 세탁기의 마지막 세탁은 늘 이런 소리였다. 치치카카, 치치카카. 그것은 남자의 유년시절 석양을 흔들어 놓던 기차 소리 같기도 했다. 기차는 칙칙폭폭, 칙칙폭폭. 세탁기는 치카치카, 치치카카. 욕실에 들어앉은 기차는 바퀴가 없었다. 길지도 않았다. 소리만 비슷했다. 종착역을 향해 마지막 힘을 내어 달리듯 욕실 안의 작은 기차는 아니 세탁기는 세탁의 완성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삐이 삐이 삐이. 이번에 내리실 역은 빨래 줄입니다.

마침내 지루하고 현란하고 시끄럽던 세탁이 다 되었다. 한 시간 동안 3회, 매회 수 만 번 을 빙그르르 몸을 회전시켰던 세탁기는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남자는 내일 모레나 아니면 그다음 주 화요일쯤 다시 새벽 두 시에 세탁기를 돌릴 것이다. 그리고 세탁기가 남자의 일을 대신하는 동안 라디오를 켜거나 텔레비전의 채널을 1번부터 254번까지 차례대로 돌리다가 가장 맘에 드는 채널을 하나 정하고 한동안 그 화면이 보여주는 야하거나 현란하거나 지루하거나 괴팍한 장면을 응시할 것이다. 세탁기의 첫 번째 세탁이 끝나면 남자는 변함없이 오후의 일을 생각할 것이고 두 번째 세탁이 끝나면 어둠 속에서 두 눈을 깜빡거릴 것이고 세 번째 세탁이 끝나고 삐이. 삐이. 삐이. 이렇게 세 번 세탁의 완성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면 남자는 오늘처럼 이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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