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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두봉 지하차도

성실하지만 격렬하진 않았다.

by 김인철

매일 잠두봉 지하차도를 오고간다. 잠두봉 지하차도는 내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는 성실하긴 했지만 격렬하지 않았다. 문득 그게 나의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축한 자의식 안에선 나름 성실하고 치열했지만 시선이 사람들의 바깥으로 들어나는 자리에선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성난 사자가 아닌 수더분한 토끼였다. 삶을 격렬하게 꾸려가는 이들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바라보기만 했다. 돈이나 명예가 중요하지 않다기 보다는 그런 사안들은 늘 욕망에 좌우 되기 마련이니까. 나는 대개 정의와 오류의 중간에서 꽤 오랫동안 선택을 유보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내가 한 선택은 대부분 나에게는 오차가 없는 마이너스였다.


요즘 밤 하늘엔 달이 두 개 떠 있다. 낮의 태양이 두개라는 상상보다는 밤의 달이 두개를 상상하는게 훨씬 낭만적이다. 하지만 이건 축축한 자의식의 문학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과학적 사실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년시절의 끝'에 선 것처럼 시간은 영원의 끝에 닿았고 달이란 단지 그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찰나의 시간일뿐이기에. 그 무한의 끝에 다다른 거대함 속에서 달과 돌맹이의 차이는 무의미 하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작고 궤도가 멀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나는 지구와 운명을 같이 할테지만 다른 하나는 조만간 궤도를 이탈 할 테니까.


잠두봉 지하차도_위키미디어 공용.jpg 출처_위키미디어


2018년 5월부터 2년간 성남과, 고양 두 도시를 살고 있다. 왕복 100킬로다. 나는 매일 아침 일터를 향해 내부 순환로를 시속 육십에서 칠십 킬로미터로 달린다. 마음같아선 시속 150킬로로 달리고 싶지만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내부순환로에서는 불가능한 속도다. 나는 매일 인내하며 강변북로와 올림픽 대로, 자유로를 오가고 있다. 가끔은 한강에서 날아온 비둘기 한 두마리가 내 시선과 수평을 유지한 채 비행을 하기도 했다.


잠두봉 지하차도를 들어갈 때마다 하루키의 소설을 떠올렸다. 유럽에 경도 되었거나 아니면 문학적 코스모폴리탄 하루키의 자의식은 나의 것보다 만배는 더 깊고 황량했다. 잠두봉 지하차도를 벗어나기전, 출구가 보이기 전 나는 다른 세계로 빠지거나 미끄러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시간. 혹은 두시간 후에 감당해야할 일들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행거리가 17만킬로를 넘은 내 자동차는 단 한번도 잠두봉 지하차도에서 옆으로 빗겨 나거나 싱크홀 속으로 미끄러지지 않은 채 그곳을 허무하게 빠져 나왔다.


다시 하루키를 읽고있다. 1Q84년의 두 번째 장인 7~9월을 넘기는 시간은 짧았지만 10월이 오기까지 상당히 긴 공백이 필요했다. 그 공백은 대략 십삼개월 이었다. 그 사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역병이 창궐하는 세계에서 피폐해졌다.


하여 올해는 2Q20년으로 기억 될지도 모른다. 그래야 한다. 2020년으로 기억 되기엔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너무 괴괴하다. 태풍 마이삭은 내 2007년식 아반떼의 지붕과 뒷유리를 날려버렸다. 우주가 평행우주라는 주장은 믿지 않지만 나비효과는 믿는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여기는 며칠 전 태풍이 친 날벼락의 효과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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