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 다시 온지 8일째다. 3주 간의 귀한 휴가로 탈서울, 탈자취를 감행했다. 고향집에 있는 '엄마호텔'에서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20년 간 내가 자란 도시, 15년 간 내게 휴식이 된 도시. 이곳에서 나는 어릴 적 생각도 하고, 앞으로 살고 싶은 미래도 그리면서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집 앞 코스모스와 따스한 가을 햇볕. 나 혼자 걷는 골목길과 천변 잔디밭. 아직 푸르름이 남은 초록색 들판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우리집 남매들은 부모님이 사는 이 정읍의 아파트를 '엄마호텔'이라 부른다. 엄마호텔에 오면 매일 아침 갓지은 엄마밥이 조식으로 나오고, 깨끗한 침구와 부드러운 수건이 내 몸을 감싼다. 때론 늦잠을 즐기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곁들인 브런치를 먹기도 한다. 서울 자취 생활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려면 얼마나 큰 노동력을 들여야 가능한지 알기에, 엄마호텔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값진 것이다.
오늘 아침 엄마호텔의 조식 메뉴. 연근, 비트, 당근, 사과, 꿀을 넣고 갈아만든 ABC주스다.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농협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사온 신선한 식재료들로 만들었다. 무척 건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대학 이후 서울로 떠나온 뒤 15년만에 다시 찾은 정읍은 고요했다. 엄마호텔에서 안방 돌침대에 누워 큰 텔레비전으로 예능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웃었다. 엄마랑 같이 임영웅도 보고 호중이도 봤다. 냉장고에는 신선한 과일이 가득했다. 집엔 따스한 된장국에 김치가 항상 있다. 이렇게 며칠 간 머문 뒤 나는 더이상 서울 자취방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휴가를 3주 내리 쓰겠다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네 시간 동안 부장에게 보낼 이메일을 썼다 지웠다, 망설임을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막상 통화는 길지 않게 끝났고 홀가분했다. 회사 생활에서 휴가를 쓰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란 건 없는 것 같다. 회사는 언제나 일이 많고 일손은 부족하니까. 8년 간의 직장생활에서 팀에 손이 넉넉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늘 각종 휴직자들 사이에서 "언제 충원되냐"고 외치며 2인분, 3인분을 했던 기억들 뿐. 그 때 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하며 견뎠다. 내가 몸이 아프거나 휴식이 꼭 필요할 때 반드시 죄책감 없이 쉬어야겠다고.
그랬기에 나의 3주 휴가 의사에 관리자가 싫은 티를 냈지만 그다지 미안하지 않았다. (물론 현실의 통화에선 허공에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긴 했다) 부장은 "다른 팀원들도 못 쉬고 있는데 (네가 휴가를 가다니)"라고 했다. 다른 팀원이 못 쉬고 있는 게 나 때문은 아닐텐데. 쓰라고 있는 휴가라서, 그래서 썼다. 내가 정말 원할 때 나를 위해 용기를 냈다. 앞으로 긴 휴가 기간 동안, 정읍에서,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