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그리고 고통 2
해당 글은 원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삶을 진지하게 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하든,
삶에서 깨달은 피조세계의 두려움이라는 진실 …
만물에 깔려 있는 그 공포스러운 불안을 인정하면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
괴로움은 일상적이다. 그것은 피할수도 없을뿐더러,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광범위하다. 게다가 그 모든 괴로움들은 죽음처럼 무작위적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사전에 대비할 수도 없으며, 유능한 지도자나 든든한 방어선이나 충분한 경제력이나 사회체계의 변혁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끔찍한 참사를 막을 수 없다. 혹자는 더 뛰어난 사람을 책임자로 뽑아서 사회의 체제를 바로잡기만 한다면 다시는 이전에 일어났던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우고, 또 많은 돈과 권력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끔찍한 질병에 걸려 몸져 눕게 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며, 모든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경험한다. 즉,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며, 불가해한 힘에 휩쓸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삶은 비극적이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저절로 아는 사실이다.” J.R.R. 톨킨은 소설 <반지의 제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더 명료하게 묘사한다.
악을 무찌르고 눌러 놓아도 한숨을 돌리고 나면 놈은 어김없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다시 자라난다.
‘일상 속에서의 괴로움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탄생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문제이며, 다만 그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논의 방식과 그 해결책이 문화적 특성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되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지나 오면서 과거 전통적인 문화와 현대적인 문화 사이에는 고통에 대한 인식의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과거에는 “고난의 원인을 주로 영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윤리적인 맥락에서 인식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어떤 이들은 누군가에게 찾아온 비극을 그가 바르게 살지 못함으로 인해 나타난 인과응보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윤리적인 법칙에 따리고 또한 그들이 믿는 신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들의 인생에 큰 문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윤회사상도 이러한 윤리적인 개념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어떤 이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이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들이 정한 불행한 운명(이를 무슬림에서는 ‘알라의 뜻’ 이라고 칭하곤 한다)에 의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유일한 미덕은 절망적인 운명에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움으로써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 또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둠과 빛의 세력이 충돌하는 전쟁터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사악한 존재로부터 온 것이며, 고난은 스스로가 악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과거에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들은 하나의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고통은 “삶에 더 큰 유익을 도모하는 통로”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역경은 인간의 영적인 성장이나, 명예, 그리고 선의 승리와 같이 ‘삶의 목적과 의미’을 갖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렇기 때문에 삶 속에서 겪는 고통을 ‘가치 있는 무언가’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과는 180도 다른 형태를 보인다.
과거에는 개인이 겪는 고통에 반드시 어떠한 ‘원인과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설령 그 이유를 개인이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지적 한계 때문임을 겸허히 인정하였다. 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부터 인간은 그의 사고와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찰력과 논리력으로 만사를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으며, 이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즉, “특정한 역경에서 합당한 이유를 우리 스스로 찾아낼 수 없다면 하나님도 타당한 까닭을 제시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진정으로 세상의 주인이자 신의 자리에 올라서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개인이 겪는 고통에 ‘신의 의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들이 먼 훗날 완벽하게 분석하고 다스리게 될 과학적인 무언가로 작동된다고 판단한다. 한 인간이 겪는 괴로움은 죄악의 문제도, 선과 악의 싸움도,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미리 결정지어둔 초월적인 힘의 결과도 아니다. 고난은 우연히 발생한 ‘사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음은 리차드 도킨스의 말이다.
자연계에서 매년 발생하는 고난의 총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 무차별적인 물리력과 유전적인 복제가 지배하는 우주에서 어떤 이들은 상처를 입고 또 다른 이들은 행운을 누리지만 거기에서는 어떠한 운율이나 인과관계, 더 나아가 어떠한 정의도 없다. 인간이 아는 우주는 실제로 예상되는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무슨 설계라든지, 목적이라든지, 선이나 악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냉혹하리만치 무심할 따름이다.
도킨스는 역경과 마주했을 때 영적인 수원지를 바라보며 목적과 의미를 찾는 태도는 '유치한' 짓이라고 비판한다. 즉, 현대성이 만들어낸 세속적이고 과학주의적인 주장에 의하면 고난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불행한’ 일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또한 “공허하고, 헛되기 이를 데 없어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사막이나 다름없다.” 과연 당신은 이것을 받아들일 자신이 있는가? 기적이 없는 사회, 모든 것이 과학으로 설명되는 사회, 마침내 고통을 극복했지만 그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세상, 그리고 모든 것들을 홀로 해결해야 하는 그 외로운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때로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신의 숨은 뜻이 있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각자에게 찾아온 고난에서 의미가 찾으려 하는 성향이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이를 인간의 내면 속에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지우고 살아간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2012년 12월,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들을 추모예배와 장례식이 잇따라 진행되었고, 이 모습을 바라본 사무엘 프리드먼(Samuel G. Freedman)은 <뉴욕 타임즈>에 “위기 상황에 인본주의자들은 보이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고난을 맞닥뜨린 사람들부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정치인들까지 모두 명백한 종교적 용어와 상징들을 사용했음을 주목했다. 이것은 분명한 현상이었다. 무신론을 택하면서 세속화에 빠져가던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세상에서 하나의 큰 사회 공동체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이 떠났던 신앙으로 다시 돌아와 그들이 비난했던 신을 찾으며 그가 그들의 사회를 보살펴주기를 소망하였다. 프리드먼은 말한다. “결국 껄끄러운 질문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인본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믿고 따르는 종교가 없는 미국인의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시쳇말로 ‘무당파’(인격적인 신이나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 않는 세속적인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들은 온데간데없어 보인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치게 된다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비세속적인 문화 그리고 종교에 손을 뻗는다. 총격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한 여성은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고백했지만, 그를 포함한 대다수의 피해자들에게 세속적인 담론들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이가 땅에 묻히던 그 순간, 대략 30초쯤,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숨진 아이의 영혼이 …… 사라지는 것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감지했다. 그러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종교적인 신념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살아왔지만, 더없이 큰 슬픔이 덮친 상황에서는 더 이상 믿음을 차단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신앙적인 신념을 밀어내야 한다거나 리차드 드킨스의 표현처럼 “유치하다”는 낙인을 찍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떠나서 너무나도 잔인한 처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과 인본주의는 그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의 부조리함과 불공평함을 상기시키면서 나름 낭만적인 결론과 함께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신은 죽었다.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질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 될지를 직접 결정할 차례이다. 인생은 스스로 어떻게 빚어가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를 갖고 충만해지며 근사해질 것이다.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그토록 갈망하던 초인(招人)의 삶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삶은 정해져 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신이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로지 내가, 내가 직접 나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인본주의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영적이고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질서와 원리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스스로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 될 것인지를 직접 결정하는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신이 없다면 더 이상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자아는 “자신을 위해 사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주권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 그들의 주체성을 가로막는 유일한 존재는 신뿐이다. 세상에 초월적인 존재가 실존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그들의 삶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그들의 주체성을 가로막는 몹시 까다로운 존재라고 느껴질 것이다. 팀 켈러 목사는 말한다.
“현대인들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개별적인 자아의 자유와 자율성이며, 신의 존재는 그 가치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므로 하나님은 이미 미심쩍은 대상일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의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영적인’ 것을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 죽음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 없는데,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생명이란 죽음에 저항하는 모든 작용의 총체일 뿐이다. 그러니 죽는 순간 생명이라 불러 왔던 하나의 저항도 사라지게 된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이전에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던 온갖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빼앗긴 상태를 가리키면서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위로가 되는지 다소 의구심이 든다. 즉, 신을 떠난 사람들은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또 어떤 의미를 찾아가던간에, 결국 이 세상과 삶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이 세계가 오로지 물리적인 우주일 뿐이라는 철저하게 세속적인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삶의 목적을 가져다주는 요소는 물질적인 무엇이거나 이 세상의 조건(안락한 생활이나 안전, 쾌락 등)이어야 한다.”
안락함과 쾌락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혐오 그 자체일 것이다. 고통은 그 두 가지를 한 순간에 빼앗아버린다. 그래서 안락함과 쾌락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현대 사회는 역사의 어떤 순간들보다도 훨씬 더 고통에 민감하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경과 고통 앞에서는 훨씬 더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충격에 빠진다. 북유럽 고대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는 1500년 전에 살았던 인류가 상실과 폭력, 고난과 죽음에 얼마나 당당하게 맞섰는지를 알면 현대인들은 기가 죽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떤 이는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면 깜짝 놀라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연약하고, 세속적이며, 소심한’ 모습을 보면 선조들 역시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무기력함은 지난 세대뿐 아니라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과도 분명하게 대조된다.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형외과 수술의 전구자로 인디아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해 미국에서 마쳤던 폴 브랜드(Paul Brand)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을 피하려는 사회와 맞닥뜨렸다. 예전에 진료했던 이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안락한 환경에 살면서도 환자들은 고통을 다룰 준비가 훨씬 부족하고 시련 앞에서 한층 심한 충격을 받았다.” 브랜드가 그의 책 <The Gift of Pain(고통이라는 선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인들에게 고통이 그토록 충격적인 이유는 삶의 의미를 쾌락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두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이 되고 또 개인의 삶의 유일한 주인이 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나 고통의 의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고통을 혐오한다. 그래서 그들의 유일한 지상목표는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한 멋진 신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저 지금 이 세상을 덜 고통스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것만이 유일한 행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옛 현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현실에 맞추느냐가 중요한 문제였으며 지식과 자기훈련, 덕성에서 답을 찾았다. 현대인들에게는 … 어떻게 현실을 다스려 인간의 욕구에 맞추느냐가 핵심 과제이며, 해결책은 테크닉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위로를 받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과 상태를 없애는데만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통증 치료, 심리적 및 의학적 치료, 그리고 법률이나 공공정책의 변화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의 몫이다. 이제 슬픔과 괴로움과 염려와 같은 감정들은 내면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정신장애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개인의 고통을 없앨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으로 이어지는지 아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눈물과 희생, 그리고 죽음까지 감수하며 지켜야 하는 공동 운명체와 같은 개념은 죽은지 오래다. 당장의 만족이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삶의 지표’로 자리 잡았다.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니 국가를 향한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웃음거리가 되었고 ‘집단의 비전’같은 것이 자리 잡을 여유는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