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는 힘이 세다

어둠과 추위와 무서움도 이겨요.

by 은혜은

절절 끓는 방바닥 덕분에 따끈해진 요 위에서 자고 있던 내 눈이 떠진다. 신호가 왔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너무 많이 먹지 말걸.'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침까지 참아보고 싶지만 결국 옆에 누워 자던 1호 언니를 살살 깨운다.

"언니야, 화장실 가자."

2호, 3호, 막둥이 남동생 깨울까 봐 작게 불러보지만 언니는 눈 뜰 생각을 않는다. 다시 언니 몸을 흔들어본다.

"언니야, 나 화장실 급해."

흔들어 깨우는 다급함을 알아챈 걸까. 언니 눈이 슬그머니 떠진다. 내 입이 급하게 뻐끔거린다.

"화장실. 화장실."

상황을 눈치챈 1호 언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으켜 겉옷을 걸친다. 나도 얼른 일어나 점퍼를 걸치고 방문을 연다. 겨울 새벽의 쨍한 공기가 날카롭게 뺨에 와닿는다. 괜히 1호 언니에게 미안해 언니를 슬그머니 쳐다보니 언니는 나보다 먼저 신발에 발을 구겨 넣는다. 나도 얼른 신발을 신고 일어선다.


어둠에 덮인 앞마당은 새삼스럽다. 숨바꼭질 단골 장소인 장독대 위의 장독들은 둥글고 빵빵한 낮의 귀여움 대신 스산하게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급히 눈을 내리니 장독대 아래 수돗가에 서 있는 물펌프와 눈이 마주쳤다.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물펌프는 한낮의 작두질을 나무라듯 엄한 눈으로 쳐다본다. '미안, 매달려서 장난 안 칠게.' 어둠을 입은 친구들의 얼굴은 낮과 전혀 다르다. 무서움에 가슴이 벌렁거리고 쪼그라든다.

얼른 언니를 쫓아가 손을 잡는다. 춥고 깜깜한 이 마당에서 유일한 온기를 찾아 파고든다.

벌렁대던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뒷마당으로 가는 담벼락을 따라 돈다. 이 담벼락 너머는 차가 다니는 큰길이고, 그 길 너머엔 으스스한 놀이터(공동묘지)가 있다. 낮엔 그저 둥근 언덕이던 것이 밤만 되면 으스스해 보이는 건 어둠 탓이 분명하다. 달이 해처럼 밝으면 좋을 텐데.

자박거리는 우리 발소리와 마당을 휘감아 도는 바람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 쫑긋하며 뒷마당에 들어선다. 심심할 때면 들어가 놀잇감을 찾는 창고와 그 옆에 있는 화장실이 보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우리의 보물섬인 창고는 어둠 속에서 진짜 해적이 나올 것 같은 섬이 됐다. 둥글게 말아 켜켜이 쌓아 올린 그물과 대야들, 삽, 갈퀴, 키, 빗자루, 용도를 알 수 없는 포대들 사이 어둠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가 보이는 것 같다. '아, 무서워.'

꼭 잡고 있던 언니 손을 더 꽉 쥔다. 그 손은 화장실 앞에 도착해 '딸깍' 소리와 함께 화장실 불이 켜지는 걸 보고 나서야 놓는다. 손을 데우던 작은 온기를 놓기가 아쉽다.


삐걱이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회색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은 온통 무채색이지만 깨끗하다. 뒤로 나 있는 작은 창 하나와 휴지통이 전부지만 그래서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 뭐가 있는지 한눈에 다 들어오니까.

쪼그리고 앉으니 찬공기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온다. '얼른 볼일 보고 나가야지.' 생각한 순간, 뻥 뚫린 화장실 아래 공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런. 생각났다. 나쁜 김철수!!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여자 화장실 근처에서 우리 반 철수 일당들이 큰 소리로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를 외치고 돌아다닌다. 그때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유치한 녀석들이라고 비웃지만 막상 화장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어둡고 칙칙한 학교 화장실에선 사실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니까.

방학하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가 생각나버렸다. 나쁜 철수 일당들 같으니라고!

한번 떠올리니 무서움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담벼락 뒤의 수많은 묘지 주인들 중에 누구 하나 찾아와 어떤 휴지 쓸지 물어보면 어쩌지. 그럴리는 없겠지만 쪼그라든 마음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 흘끔흘끔 아래공간을 쳐다보다가 결국 언니를 부른다.

"언니야~"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언니는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새어 나오는 내 목소리가 반가웠나 보다.

"다했어?" 묻는 목소리가 밝다.

"아니, 아직. 그냥 언니 있는지 불러본 거야."

점점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실린 불편함을 감지했나 보다. 언니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무서워?" 묻는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아, 아니. 안 무서워. 그냥."

무섭다고 하면 밖에 기다리던 언니도 무서워질까 봐 아닌 척 해본다. 감정은 옮겨가니까. 하지만 목소리에 지문처럼 '무서움'이 달라붙어 있는걸 나만 몰랐나 보다.

화장실 문을 조금 더 빼꼼 열고 언니가 문 옆에 와 선다.

"내일은 인형 옷 만들기 할까? 드레스 만들자. 파티 드레스."

뜬금없는 언니 말에 신경이 확 쏠린다.

"드레스? 내일 무도회 할 거야?"

구판장에서 종이 인형을 사면 입힐 수 있는 여러 옷들도 함께 따라 오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인형옷을 만들어 입히는 걸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오리면 평소 내가 입고 싶었던 예쁜 옷들을 인형에게 입힐 수 있다. 내일은 간만에 무도회가 열리려나보다. 언니들보다 예쁜 드레스 만들어야지. 머릿속이 어떤 드레스를 그릴지 생각하느라 바빠진다.

파란 휴지나 빨간 휴지는 점점 흐릿해지고 색색의 드레스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사방을 살피느라 조심스러웠던 올 때와 달리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날아갈 듯 빠르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직진. 후다닥 돌아가면서도 꼭 잡은 언니 손은 놓지 않는다. 작은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는 방으로 돌아가는 방향표시등이자 힘을 내는 연료다. 놓을 수 없다.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여니 훈훈한 온기가 먼저 반긴다. 아까 빠져나온 모양 그대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이불속으로 쏙 들어간다. 절절 끓는 바닥이 데워놓은 이불로 온몸을 감싸자 추위와 무서움에 떨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린다.

"언니야, 잘 자."

편안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전하는 인사에 마음을 담아본다.

'고마워, 언니야. 덕분에 화장실 다녀왔어.'

마주 인사하는 언니 몸이 따뜻하게 풀어지는 게 보인다.

오늘 밤, 콧등 시린 찬바람이 1호 언니에겐 비켜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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