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바리의 계절

일꾼은 아무나 하나!

by 은혜은

마당에 빈틈없이 파란 천막이 깔렸다. 그 파란 천막 위로 둘둘 말린 그물이 내려진다. 그냥 돌돌 말아놔도 한 덩치 하는 그물이 그물코마다 끼인 명태 덕분에 덩치가 산처럼 불어났다. 리어카에 켜켜이 쌓여 옮겨진 그물들은 오늘 새벽 아빠 배에서 끌어올린 거다. 춥지만 넘쳐나는 명태로 어른들 얼굴이 달처럼 밝다. 이렇게 집집마다 그물정리에 바쁜 지금은, 동태바리(겨울명태잡이)의 계절이다.


이 계절엔 누구나 바쁘다. 필요하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 '고양이 손'을 대신하게 됐다. 수돗가 옆, 빨간 대야 위에 쌓인 손질된 명태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1호, 2호, 3호와 나. 커서 헐렁거리는 목장갑 하나씩 끼고 대야를 둘러싸고 앉는다. 나도 일당백까진 아니어도 반쪽 정도는 되는 일꾼임을 보여줄 때가 왔다.

한 팔 길이로 결 따라 길게 쪼개놓은 빨간 노끈 뭉치에서 끈을 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알과 창자, 써거리(아가미)까지 빼내어 깨끗해진 명태를 한 마리 집어든다. 두 마리씩 짝 맞추어 바람에 꾸덕하게 잘 말리려면 노끈으로 꿰어 걸어야 한다. 그 명태 짝 맞추어 꿰는 게 우리가 맡은 일이다.

손이 야무져 진즉 일꾼으로 뽑힌 1호 언니와 달리 나는 초보다. 구경만 하다가 언니들 모두 일꾼으로 승급되는 걸 보고 나도 해보겠다 자처했다. 언니들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덥석 집어든 명태는 생각보다 무겁다. 한 마리 들고서 끈을 꿰어야 하는 아랫입 밑부분을 살핀다. 막처럼 부드럽게 펼쳐진 부분에 끈을 끼우면 별로 힘들지 않게 들어간다. 목표지점을 눈으로 확인하고 노끈을 푹 찌르니 끈이 쏙 들어간다. 우와, 별거 아니네. 어깨가 으쓱해진다.

짝을 지을 다른 명태를 찾아본다. 크기가 비슷한 녀석으로 맞춰야 하니 찾는 눈이 바쁘다. 오, 찾았다! 신이 나서 집어 드는데 배를 훤히 가르고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맑고 희다. 알도, 창자도, 아가미도 모두 잃었지만 아직도 투명하다.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그제 저녁에 먹은 생태탕 안에 있던 눈알까지 꼭꼭 씹어먹은 내가 느끼기엔 좀 어색한 마음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눈을 피해 아래 입 밑부분만 살피며 끈을 찔러 넣는다. 역시 쑥 들어간다. 하지만 어쩐지 아까만큼 신나지가 않다. 이제 한 코 걸었는데 대야에 쌓인 명태가 산 같다. 괜히 일꾼 하겠다고 했나 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언니들 손과 달리 내 손은 한없이 느려진다.


겨울 해는 짧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마당 가득 깔린 파란 천막 위가 슬슬 정리되고 있다. 그물코에 꿰어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명태들도 많이 줄었고 그물에서 해방되어 손질되길 기다리는 명태들도 많이 줄었다. 해님 대신 마당을 밝힐 등불이 걸렸다. 등이 하나, 둘 걸린 마당엔 낮보다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는다.

손질된 명태를 쌓아놓은 빨간대야엔 일꾼이 더 많이 붙었다. 고사리 손인 우리는 흉내도 못 낼 만큼 빠른 속도로 아주머니들이 짝을 맞추고 있다. 역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꾼 한답시고 꼼질거렸지만 사실 나는 한 게 별로 없다. 한 코 꿰고 주변 돌아다니고 또 한 코 꿰고 돌아다니고. 엉덩이 붙이고 앉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손이 시리다. 마당 곳곳에 내놓은 연탄난로 위에 손이 절로 올라간다. 장갑 안에서 곱아드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어른들을 본다. 환한 낮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어른들 손은 뭔가 특별해 보인다.

'나이를 먹으면 손가락이 튼튼해져서 추위를 못 느끼는 건가?'

아직 어린 나로선 알 수가 없다.

엉뚱한 생각들이 곰실거리는 머릿속과 달리 손은 착실히 온기 곁에 달라붙는다. 아직 어린 내 손은 여전히 시리다.


몸을 하얗게 태워가는 연탄을 보고 있으니 작은 손이 하나, 둘 늘어간다. 불쑥 뛰어들어온 손들은 장갑을 벗어놓고 빨갛게 언 손을 내민다. 온통 붉어진 손들이 난로 위에 빼곡하다.

그 손들에 자리를 비켜주며 한쪽에 나란히 벗어놓은 장갑들을 본다. 장갑마다 색이 다르다. 분명 시작할 땐 똑같은 흰색이었는데 1호 언니 장갑은 검게 젖어 있다. 2호와 3호 장갑은 좀 덜 젖었고 내 장갑은 말랐다. 내 장갑만 말랐다!

열심히 농땡이 친 게 이렇게 티가 난다. 언니들 장갑 옆에 함께 놓으니 좀 부끄럽다. 반쪽 일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괜히 젖은 언니들 장갑을 들어 연탄불 위로 올린다. 그냥 바짝 말려주고 싶다.


그렇게 작은 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난로 위로 무언가 불쑥 올라온다. 주먹만 한 소라다. 올려진 소라를 보는 눈들이 갑자기 번뜩인다. 그물 건지는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소라의 단맛을 알기에 번뜩, 일이 끝나가는 걸 알리는 신호탄과 같기에 또 한 번 번뜩. 여러모로 반가운 소라다.

뜨거운 불 위에 올려진 소라는 시끄럽게 익어간다. 몸을 비틀 때마다 몸집은 줄어들지만 냄새는 퍼져나간다. 연탄난로마다 한두 개씩 올라간 소라 익는 냄새가 마당을 돌아 담장을 넘어간다.

기다리는 엉덩이가 마음을 따라 들썩거린다.

'다 익으면 얼른 집어서 젓가락 콕 꽂아서 돌돌 말아 빼먹어야지.'

저녁밥 먹을 때가 가까운 시간. 출출했던 뱃속을 채울 생각에 입 끝이 절로 벌어진다.


가장 먼저 올라왔던 소라가 익자마자 마른 목장갑을 끼고 뜨거운 소라를 덥석 잡는다. 소라를 거꾸로 들고 젓가락을 꽂아 소라와 젓가락을 서로 반대방향으로 살살 돌려가며 조심스럽게 뺀다. 돌돌. 톡. 돌돌. 톡.

조심스러운 손길에 잘 익은 소라가 가장 끝에 감추고 있는 똥까지 쏙 빠졌다. 우와! 우와!

이제 한 김 식힌 뒤 입에 넣고 꼭꼭 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입에 꿀꺽'이 안된다. 다른 소라들도 금방 익을 테니 이 소라는 한 입에 먹어버려도 될 텐데 자꾸 망설여진다. 젖은 장갑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결국 마음이 시키는 대로 뱉는다.

"언니야, 이거 같이 먹자."

내 말에 언니들 눈이 똥을 매단 채 젓가락에 꽂혀있는 소라에 붙는다. 소라맛을 알아도 나보다 잘 알고, 배가 고파도 나보다 더 고플 언니들이다. 반짝이는 눈들을 보니 맞는 선택이었나 보다. 소라를 작게 쪼갠다. 작게 쪼개진 소라는 입안에 꽉 차는 대신 '나눠 먹는 즐거움'을 남긴다. 맛나다. 그 어느 때보다.

이따가 저녁 밥상에 올라올 생태탕에 눈알도 먹지 말아야겠다. 아까 명태와 눈이 마주쳐서는 아니고 그냥 오늘은 '최애'를 언니들에게 양보하고 싶다. 젖은 장갑은 자격이 충분하다.


오늘은 안 그래도 맛있었던 생태탕을 더 맛있게, 감사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날이다.

그리고 일꾼은 올해 말고 내년 동태바리쯤,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지금은 그냥 소라만 먹는 게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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