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먹어요, [모모]
짧은 겨울해가 넘어가느라 하늘이 붉어진다.
종일 구름 뒤에 숨어있던 해도, 해와 달리 봄처럼 따뜻했던 바람도, 특유의 색으로 바다와 선을 긋던 하늘도 제 할일 다한 듯 미련없이 사라지고 있다. 아쉬운 마음에 마당을 종종거리며 안녕을 고하는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니, '이었다.'라고 해야하나. 오늘이 다 가고 있으니까.
사실 생일이라고 해도 특별할 건 없다.
윤기 흐르는 쫀득한 찰밥을 꼭꼭 씹어 단맛을 음미하고 소고기 듬뿍 들어간 미역국을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밥상에 오르는 찰밥과 미역국은 딸의 생일을 기억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한껏 배부르게 먹었으니 생일은 그 의미를 다했다. 우리 집에선 따로 특별한 선물이 오가진 않는다. 하지만 선물이 없어도 마음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다. 일년 중 단 하루, 세상에게 '나 태어난 날이야!' 외치고 싶은 기분은 내 마음이니까.
똑같은 일들을 하면서도 구름을 밟은 듯 들떠 있던 마음은 오늘이 가는게 너무 아쉽다. 그래서 강아지처럼 마당을 돌며 떠나는 오늘의 뒷꽁무니를 붙잡아 본다.
아까 낮에 다녀온 영희네 집의 책들이 눈 앞에 둥둥 떠다닌다. 작년에 도시에서 이사온 영희네 집엔 책이 많다. 우리 동네에서 어린이용 전집이 있는 유일한 집이다. 처음 영희네 집에 놀러 갔던 날 현관 바로 앞에 놓인 책장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보기만 해도 화려한 색감의 책들은 가만히 앉아서 날 불러댔다.
'어서 와! 이런 건 처음이지?'
홀린 듯 주저앉아 인사도 드리기 전에 책장에 책부터 꺼내 들었다. 피터팬, 소공자, 소공녀, 빨간머리 앤....
이렇게 예쁠 수가! 이렇게 재밌을 수가!
교실 뒤에 있는 자그마한 규모의 학급문고와는 또 다른 세계가 여기 있었다. 정신없이 책을 보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영희 엄마는 내게 자주 놀러오라고 하셨다. 그 뒤로 영희네 집은 책이 고플때 가는 도서관이 되었다.
오늘도 그 영희네 집에 다녀왔다. 생일인 내게, 스스로 주는 선물이다. <톰소여의 모험>을 읽으며 어디나 철수들은 다 똑같다는 진리를 깨닫고, <빨간머리앤>을 읽으며 앤이 되어 다이애나와 맹세도 했다. 책장만 넘기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니, 곰이 꿀단지 핥듯이 그 앞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한참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쉽다. 우리 집에도 이런 꿀단지가 있으면 좋을텐데. 엄마, 아빠에겐 말하지 않는 바람이 마음 속에서 한번 휘돌아 간다.
그렇게 돌아와 안녕을 고하는 오늘이 아쉬워 마당을 서성인다. 해님, 바람, 하늘에게만 인사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고 눈이 내린다. 어두워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친구가 반가워 손으로 느껴본다. 평소보다 반갑다.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시내로 볼일 보러 간 아빠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가 오셔야 저녁을 먹을 테니 방안을 굴러다니며 논다. 생일이니까 평소보다 더 열심히. 그러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은혜은!
일어나 방문을 여니 아빠다. 목깃에 하얀 털이 달린 체크무늬 코트 위에 장식처럼 하얀 눈을 얹고, 그 눈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아빠가 서 있다.
"다녀오셨어요."
인사하는 내게, 아빠는 품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민다. 뭔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니 아빠가 봉투를 흔들며 말한다.
"우리 막내딸 생일선물."
선물이라고? 놀람과 어색함, 기쁨이 정신없이 몰아치지만 손은 착실히 제 할일을 한다. 어정쩡하게 내밀어진 손이 봉투를 잡는다. 들고서 다시 아빠를 쳐다보니 왠지 신이 난 아빠 목소리가 뛰어다닌다.
"우리 막내딸 생일인 게 생각나서 서점에 갔다 왔지. 거기 직원이 추천해 준 책이야."
볼일을 마치고 내 생일인 게 생각나 서점에 들르셨단다. 직원에게 우리 딸이 책 바구미(쌀벌레)라며 추천을 부탁했단다. 나이와 평소 읽는 책들을 물어본 직원이 추천해 준 책이 이 책이란다.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아빠 목소리를 붙잡아 상상해본다.
서점을 향하는 아빠 걸음은 어땠을까?
직원에게 책바구미(아빠는 꼭 사람들에게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걸 말할 때 '바구미'에 비유한다.) 딸을 소개하며 아빠는 웃고 있었을까?
행여 내리는 눈에 봉투가 젖을까 코트 속에 넣어 오는 동안 아빠 가슴은 따뜻했을까?
선물 받고 기뻐할 막내 딸을 생각하며 아빠 가슴도 두근거렸을까?
선물을 받은 나만큼 이 모든 과정을 즐기며 기뻐했을 아빠가 떠올라 입이 절로 벌어진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가슴을 간질거리는 이 기운이 머리 끝까지 올라가 온 몸을 데운다. 이 순간만큼은 빨간머리 앤처럼 빨간 머리카락이 되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연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모모>다.
제목을 손가락으로 눌러본다. 아빠 마음을 따라가며 더듬어본다.
아빠 마음을 먹고 한 뼘, 모모를 읽고 또 한 뼘. 그렇게 자라 날 내 마음을 응원하며 소중하게 껴안아본다.
아직 책장도 넘기지 않았지만 태생부터('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온 순간부터) 내 인생책이 될 수 밖에 없는 모모를 만났다. 친구 영희네 집처럼 많은 꿀단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끌어안고 헤집어 퍼먹을 수 있는 나만의 꿀단지가 생겼다.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폴폴 풍긴다.
오늘은 일년에 한번 뿐인 내 생일이다.
노을이 질 무렵 '이었다.'였던 내 생일은, 다시 '이다.'로 바뀌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내 생일은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