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기운이 쏟아지는 밤

소원을 빌어요!

by 은혜은

달큰한 밥 냄새가 솔솔 풍긴다. 코끝으로 밀고 들어오는 냄새에 눈이 슬쩍 떠진다. 평소보다 유혹적인 향을 뿜는 밥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다.

옆을 보니 언니들은 벌써 일어났는지 아무도 없다. 어디 있을지는 뻔하다. 분명 부엌에 있을 거다. 번개같이 이불 정리하고 부엌으로 가니 연탄아궁이 위에서 떡 할 때 쓰는 떡시루가 김을 폴폴 뿌리며 열일 중이다. 달큰한 냄새가 거기서 나는 걸 보면 떡시루는 오늘 오곡밥을 쪄내고 있나 보다. 언니들은 그 아래에서 땅콩과 잣을 까먹느라 바쁘다. 엉덩이를 슬쩍 옮겨 늦게 온 내 자리를 만들어 주는 언니들 틈에 쏙 끼어든다.


엄마는 부럼깨기는 나이만큼 먹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빨리 최고 학년인 6학년이 되고 싶으니까 많이 먹을 거다.(사실 매번 나이보다 많이 먹는다!) 이렇게 하면 까마득해 보이는 6학년이 좀 더 빨리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나는 천천히 크고 있다.

딱 13개만 먹어서 그런가. 몇 개 더 먹어볼까?

몇 개를 먹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복잡한데 손은 땅콩 껍질을 비틀어 부수고 안에 있는 알맹이만 잘도 골라낸다. 골라내는 족족 입으로 들어가는 땅콩이 13개를 훨씬 넘어선 뒤엔 세는 걸 멈췄다. 고소함이 오도독 튀는 입안이 행복하니 개수가 뭐가 중요한가 싶다.

부럼깨기 하고 나니 오곡밥도 완성이다. 시루의 뚜껑을 열어 자욱하게 올라오는 김을 빼니 윤기 좔좔 흐르는 오곡밥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섯가지보다 훨씬 많이 들어간 재료들 사이엔 내가 좋아하는 노란 밤과 적갈색 대추도 있다. 갈색이 된 밥 사이에 누워있어도 눈에 콕 들어온다. 안 먹어도 알 것 같은 맛에 침이 고인다. 부지런히 차려진 아침 밥상엔 몇 가지 나물과 오곡밥 뿐이지만 밥만 먹어도 맛있는 대보름 아침이다.


아침 먹고 마당에 나가니 분유통이 나란히 서있다. 저녁 쥐불놀이 때 쓸 깡통이 필요해서 앞 집 아기 영희네서 가져왔다. 다섯 개 나란히 놓인 깡통을 들어 흔들고 있으니 아빠가 오신다. 커다란 송곳과 망치를 들고 오는 아빠는 오늘도 우리의 도깨비방망이가 될 예정이다.

의자에 자리 잡고 앉은 아빠는 깡통을 옆으로 눕혀놓고 흔들리지 않게 양 옆을 벽돌로 고정한다. 그리고 송곳을 대고 그 위를 망치로 툭툭 가볍게 친다. 그냥 툭 쳤을 뿐인데 구멍이 숭 뚫린다. 툭, 숭! 툭, 숭!

내리칠 때마다 구멍이 생기더니 깡통은 어느새 바람구멍을 온몸에 달았다. 마지막으로, 잡고 돌릴 손잡이까지 달아주니 쥐불놀이 깡통 완성이다. 이제 완성된 깡통 속을 채워 넣는 건 우리 일이다. 각자 하나씩 들고 가 잘게 쪼개진 나무와 눈 내리기 전에 숲에서 걷어온 잘 마른 솔검불(소나무 낙엽)과 솔방울을 순서대로 넣는다. 깡통 안쪽에 쪼갠 나무를 어긋나게 교차해서 채우고 빈 공간에 솔검불과 솔방울을 채워 넣으면 불이 잘 붙고 오래간다.

'불아, 잘 붙어라. 금방 꺼지면 안 돼. 알았지?'

솔검불을 꾹꾹 눌러 넣으며 내 바람도 같이 담는다. 완성된 쥐불놀이 통을 들고 휙휙 돌려본다. 불을 붙인 건 아니지만 타오르는 불이 보이는 것 같다. 오늘은 해가 좀 빨리 넘어가면 좋겠다.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바닷가다. 넓디넓은 백사장이 쥐불놀이 장소다. 깡통 하나씩 손에 든 동네 철수, 영희들이 모여든다. 우리처럼 속까지 채워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깡통만 준비해서 바닷가에 흩어진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 넣느라 바쁜 아이들도 있다. 우리 반 덤벙이 철수도 그 중 하나다.

"도와줘. 도와줘."

사방에 외치고 다니는 덤벙이 철수를 보니 검불을 좀 나눠줘야 하나 싶다. 하지만 내 불쏘시개가 될 검불을 나눠주려니 아깝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신난 덤벙이 철수를 보니 내가 왜 고민 중인지 모르겠다.

그 때, 내 고민을 해결해 줄 해결사가 등장했다. 6학년 철수오빠다. 한 손엔 속을 채운 깡통을 들고 다른 손에 다 쓴 연습장을 들고 왔다. 철수 오빠가 도착하니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든다. 모여든 아이들을 살펴보던 철수 오빠는 통을 다 채우지 못한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더니 오빠 깡통에서 나무를 조금씩 덜어 아이들 통을 채워준다. 그리고 불쏘시개로 다 쓴 연습장을 찢어 넣는다.

역시! 6학년은 다르다. 나도 6학년이 되면 저럴 수 있을까? 저 덤벙이 철수도 6학년이 되면 저렇게 될까?

희미하게 상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냥 나도 저런 6학년이 되고 싶다.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6학년 언니, 오빠들이 돌아다니며 성냥에 불을 붙여 아이들 통 안에 쏙 넣어준다. 내 통에도 불붙은 성냥이 들어왔다. 깡통 속 검불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꽃을 키우기 위해 통을 좌우로 살살 흔들어 준다. 바람을 맞은 불은 빠르게 검불을 태우며 솔방울에 옮겨 붙는다.

'잘한다. 잘한다. 조금만 더!'

작은 내 불을 응원하며 깡통을 더 흔들어 준다.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잘게 쪼갠 나무에도 옮겨 붙었다. 됐다. 이제 이 불은 쥐불놀이가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을 거다.


불 붙이기에 성공한 깡통들이 돌기 시작한다. 서로의 간격 안에 들어가지 않게 넓은 백사장에 흩어 서서 붉은 원을 그린다.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불이 스무 개쯤 됐을 땐 깜깜해진 바닷가에 둥근 불들만 춤을 추고 있다. 눈앞에서 신명 나게 돌아가는 둥근 불꽃은 장관이다.

모래 위엔 둥근 불 수십 개가 일렁이고, 하늘엔 둥근 보름달이 떠 있는 밤.

온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아 깡통을 돌리는 팔에 더 힘이 들어간다.

'달님, 보고 있지요? 올해도 좋은 일만 가득하게 해 주세요!'

엄마, 아빠에게. 1호, 2호, 3호 언니와 남동생에게. 우리 반 철수와 영희들에게. 좋은 일들만 주세요.

커다란 달님에게 절로 소원을 빌게 된다.


해변이 붉게 일렁이고, 마음이 술렁이고, 달님이 환하게 웃는 밤.

이루고 싶은 어떤 마법이 이루어질 것 같은 정월대보름 밤이다.

이전 09화우리 동네 구판장엔 특별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