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구판장엔 특별함이 있다

어른들은 모르는 비밀

by 은혜은

우리 동네엔 구판장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급하게 찾는 물건이 있을 때 찾아가는 유일한 가게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구판장은 나와 동네 철수, 영희들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가끔 용돈을 받으면 꼭 들르는 이곳엔 뭔가 특별한 기운이 있다. 오늘도 그 기운에 이끌려 우리는 구판장으로 향한다.


집에서 구판장까지는 멀다. 거의 마을 끝에서 끝까지 가야 한다. 물론 길은 여러 갈래니까 빠른 길도, 돌아가는 길도 있다. 가장 가까운 길은 집을 나와 좁은 골목을 따라 쭉 직진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은 도전하기 쉽지 않다. 먼저 집을 나오면 처마만 보여도 피해 가고 싶은 성황당 뒷길을 걸어야 하고 그 성황당을 지나면 목청 큰 개가 지키는 철수 1호네 집 앞을 지나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목청만 크지 사납진 않은 철수 1호네 개 짖는 소리에 덩달아 예민해진 진짜 사나운 개가 으르렁거리는 철수 2호네 집 앞도 지나야 한다. 맞은편 벽에 들러붙다시피 해서 간신히 그 앞을 지나면 이젠 쓰지 않는 동네 우물 앞을 지나야 한다. 우물 덮개가 덮여있지만 여름이면 이불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은 채 전설의 고향을 시청했던 내겐 우물 역시 피하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가장 가깝지만 정말 급하지 않으면 이 길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추운 바닷가를 따라 크게 돌아서 다시 마을 안쪽 길로 들어서서는 구판장을 향해 간다. 구판장 할머니는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구판장에 가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다.


구판장에 도착했다. 신나서 고동색 나무문을 옆으로 드르륵 밀고 들어선다.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에 구판장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신다. 할머니의 상징인,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오늘은 뽀글뽀글 파마로 말려있다. 할머니 머리를 쳐다보다가 인사가 한 박자 늦었다.

"안녕하세요." 또박또박 크게 인사드리니 할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인사드린 뒤, 눈은 곧바로 군것질거리를 향한다.

아폴로, 호박꿀맛나, 코코아, 맛기차콘, 미니초코, 쌀대롱, 보석반지, 땅콩카라멜, 새우깡, 자갈치...다 살 순 없는데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금방 고를 수가 없다. 아폴로는 하나씩 꺼내서 쪽쪽 빨아먹는 재미가 있고, 호박 꿀맛나는 달큰하고 끈적한 엿같은 단맛이 난다. 초콜릿사탕 같은 코코아는 초콜릿보다 오래 녹여 먹을 수 있고 맛기차콘은 색깔 따라 찢어먹는 맛이 있다. 보석반지는 손가락에 반지마냥 끼고서 빨아먹으면 재미있고 땅콩카라멜은 이에 들러붙는다고 엄마는 싫어하지만 그 끈끈한 단맛이 좋다. 어쩌지. 나는 구판장에만 오면 고를 수가 없다. 같이 온 2호 언니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것저것 둘러보는 눈이 바쁜 걸 보면 언니도 나처럼 힘든 게 분명하다.


좁은 가게 안을 돌고 또 돌고. 몇 바퀴를 돌며 눈요기 실컷 한 뒤에 내가 고른 건 '어포'다. 긴 네모 모양의 어포는 작게 뜯어서 먹으면 고소한 맛을 오래 음미할 수 있고 크게 뜯어서 입 안 가득 넣고 씹으면 감칠맛이 폭발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다. 게다가 하나에 50원이니까 100원이면 두 개나 살 수 있다.

어렵게 선택을 한 우리는 할머니께 동전을 내민다. 집에서 구판장까지 오는 동안 행여 잃어버릴까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체온만큼 미지근해진 100원짜리 동전이 내 손에서 할머니 손으로 옮겨간다.


"안녕히 계세요." 허리 굽혀 인사드리고 돌아서는 우리에게 할머니가 사탕통을 내미신다.

"하나씩 가져가."

통 안엔 하얀 바탕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줄무늬가 섞여있는 눈깔사탕들이 가득 들어있다.

"이건 인사 값이야. 할머니가 인사 잘 받아서 배부르니 이건 인사값이다."

'어?! 인사값?'

할머니 말씀에 홀린 듯 통속에서 사탕을 하나씩 집어든다.

"감사합니다."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인사를 드리고 구판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신이 난다.


어포 2개와 인사값으로 받은 눈깔사탕 하나를 들고 집에 가는 길. 기분이 묘하다.

엄마, 아빠, 동네 어른들, 학교 선생님께도 매일 인사를 하지만 그 당연했던 인사에 '값'을 쳐준 사람은 구판장 할머니가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나 맛있는 눈깔사탕으로.

우리 인사에 배가 부르다니. 인사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구판장할머니는 역시 특별한 사람이 분명하다. 어떤 어른도 알아채지 못한 '인사로 배 채우는 법'을 알고 계신 할머니는 우리가 먼 길을 돌아 구판장에 오는 것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처음 받아본 인사값이 어색한데 기분이 좋다. 인사에 마음을 '더' 담으면 인사값을 더 많이 주시는 거 아냐?

어쩌지. 왠지 마음이 자꾸만 두근거린다.

'다음에 구판장에 들를 땐 더 크게 인사드려야지!'


우리 동네에 하나뿐인 구판장엔 특별한 기운을 풍기는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가 있다.

우리 인사에 배부르다는 할머니 덕분에 동네 철수, 영희들 인사소리는 나날이 높아가지만 어른들은 아이들 인사가 왜 더 씩씩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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