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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31. 2020

미완의 약속

어머니와 캐시미어 코트


내게는 아주 오래된 베이지색 코트가 하나 있다. 

소매 끝자락과 칼라 부분에  빛깔 좋게 윤기 흐르는 밍크가 달려 있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흐르듯이 약간 퍼져 한껏 멋스럽고 여성스러운 코트다.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아껴 입던 그 캐시미어 코트는 나에게 와서 여러 해의 겨울을 보냈지만

지금도 어제 산 옷처럼 깨끗하고 보기 좋다.

그 캐시미어 코트 덕택에 지난 몇 해의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작년 겨울에는 그 코트를 한 번도 입지 못했다. 옷장을 열 때마다 자꾸만 그 코트가 눈에 들어와 

일부러 눈에 잘 띄지 않는 안쪽 구석에 걸어 놓고 한 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코트만 보면 시어머님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차마 떨쳐 입고 거리로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작년 겨울, 부부동반 송년 모임에 나가려고 한창 분주하게 외출을 서두르고 있는데 

거실에 앉아 드라마를 보시던 어머님께서 뜬금없이 

"작은애야! 너 아비더러 새 코트 하나 사 달래고 지금 입고 있는 그 코트 나 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때는 시간에 쫓겨 무심코 흘려듣고 말았는데 

날이 갈수록 자꾸만 어머님의 그 말씀이 귓가를 맴돌아 마음이 불편했다.

자식들 잘 양육하고, 집안 살림 알뜰하게 건사하는 아내가 고맙다고 남편이 큰 맘먹고 사 준 옷인데, 

어머님께서 빼앗아 가려고 그러시나 싶었다. 

처에게는 비싼 옷 선뜻 사 주면서 당신에게는 그런 옷 한 벌 사주지 않는다고 

혹여 서운하고 노여워서 그러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해 12월 끝자락의 늦은 밤, 남편이 동문 모임 때문에 늦게 들어온다 하기에 

어머님 손때 묻은 둥근 소반에 조촐하게 술상을 차렸다. 

그 둥근 소반은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자그마한 것인데 

움직일 때마다 가끔씩 삐거덕거리고 한쪽 모퉁이가 떨어져 나간 아주 낡은 소반이다.

좋은 식탁 제쳐두고 30년 세월 동안 어머님 손때 묻어 반들거리는 그 둥근 소반에 술상을 차린 

며느리의 속내를 어머님은 금세 눈치채실 것이다.

혹여 서운하시거나 노여운 일이 있으시거든 술 한 잔 드시고 

그 마음 푸셨으면 하는 며느리의 애교라는 것을......


저녁에 먹고 남은 동태찌개 작은 뚝배기에 옮겨 담아 두부와 대파만 좀 더 썰어 다시 자글자글 끓여내고,

잘 익은 배추김치 송송 썰어 넣어 김치전 한 장 부쳐놓고, 

잰걸음으로 가게에 나가 어머님 좋아하시는 백세주 한 병 사들고 와서 

"어머님, 약주 한 잔 하고 주무세요" 자리에 누운 어머님 방문을 두드렸다. 

살다 보니, 고부간의 한 오해나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서운함도 

그런 자리에서는 툭 털어놓게 된다는 걸 터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어머님 잔을 채우고 어머님께서는 둘째 며느리 잔에 술을 부어 주시고, 

그렇게 두어 번 술잔이 비워 갈 즈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제 코트는 몇 년 입은 거라서 어머님 드리기는 좀 죄송스러워요. 

새 코트로 하나 장만해 드릴 테니 내일 저와 함께 백화점에 가요." 

술잔을 입에 갖다 대시던 어머님은 황급히 술잔을 내려놓으시더니 손사래를 치셨다. 

"아니다, 작은애야! 새 코트가 갖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 

네가 입은 그 코트가 차롬하고 얌전하니 볼수록 옷이 좋아서 엄마가 그냥 해 본 소리여.

허긴, 옷도 젊은 네가 입어야 곱지 늙은 엄마가 입어서 어디 그 때깔이 나겠냐? 

엄마가 주책스러운 소리를 했구나,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어머님, 정말 제 코트가 그렇게 갖고 싶으세요? 

그럼, 이번 겨울까지 제가 입고 깨끗하게 세탁해서 내년에는 어머님 드릴게요" 

어머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멋쩍게 웃으셨다. 

문득 내다본 창밖으로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고 아껴가며 조금씩 나누는 술잔과 함께 

고부간의 담소는 동짓달 밤이 깊어지도록 이어졌다. 


아.... 그러나 어찌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어머님에게는 그 해 그 겨울이 이생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 될 줄을....

이듬해 봄, 목욕탕에서 정신을 잃으신 어머님은 이웃집에 마실 가시듯 작별의 인사 한 마디 없이 

황망히 떠나셨고 나는 어머님과의 그 약속이 부질없어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칠십 평생 당신을 위해서는 좋은 옷 한 벌 장만하지 않으셨던 어머님께 그까짓 코트, 

왜 선뜻 벗어서 입혀 드리지 못했는지 그 회한이 아직도 가슴에 사무쳐 뼈가 저려온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세상 가득히 내리고 있다. 

가만가만 내려온 눈이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옷을 입히고 청량한 솔가지 위에 쌓이는 풍경을 

하염없이 내다보는데 어머님 모습이 떠올랐다.

눈 오는 밤, 어머님과 마주 앉아 나누었던 술잔에 담긴 그 따스한 눈빛이 사무쳐 자꾸만 가슴이 젖어오는데

입을 열면 금세 통곡이 터져 나올 듯 그리움이 목젖까지 차오르는데

그 날 그 밤처럼 창밖에 저리도 흰 눈은 내리는데, 소리 없이 흰 눈은 퍼붓는데........ 

어머님, 천상의 어디쯤에서 당신도 저 눈을 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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