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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31. 2020

어머니의 스웨터

어머니 돌아 가신 뒤 마무리 한 스웨터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일요일 새벽, 남편과 함께 어머님을 뵈러 집을 나섰다.
‘눈 내리기 전에 어머님 산소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바쁜 남편에게 누차 간청하여 어렵게 나선 길이었다.  
금강을 건너고 작은 도시를 지나 수확을 끝낸 황량한 들판, 
찬서리 머리에 이고 텅 빈 논을 혼자서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를 뒤로 하고 

한참을 더 달려가야 닿을 수 있는 어머님의 보금자리. 
요령소리 앞세우고 총총히 떠나올 때 무심히 빈 울어대던 산까치는 아직도 솔밭에 제 발목을 묻어놓고, 

지천으로 진달래 흐드러지던 산자락에는 바람 부는 대로 가랑잎이 우수수 몰려다니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포실한 스웨터를 꺼내어 어머님의 봉분을 덮었다.
"작은애야, 아주 곱고 따습구나" 허허로운 어머님의 웃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힐끗 훔쳐본 남편의 눈시울이 붉었다 어머님 살아 계실 때 짜기 시작했지만 
갑작스러운 이별로 늦게 완성해서 가지고 온 스웨터다. 


지난 초가을, 철 지난 옷장을 정리하는데 장롱 한쪽 모퉁이에 있는 백화점 쇼핑백이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살며시 쇼핑백을 열어 본 나는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짜다 만 어머님의 스웨터였다.
미처 한쪽 팔을 달지 못하고 장롱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주색 스웨터. 
새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 옷가지를 정리하다가 미완성의 스웨터를 앞에 놓고 앉아서 

한참 동안 고민했던 일이 그때서야 생각났다.
'스웨터를 입으실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한쪽 팔을 달지 못한 스웨터와 털실 타래를 

가지고 가야 하나...  그냥 버리고 가야 하나...' 그러다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와 
장롱 구석에 넣어 두고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털실 뭉치를 꺼내어 놓고 아직 짜지 못한 한쪽 팔 부분을 한 올 한 올 짜기 시작했다 .
남편은 "어머니도 계시지 않은데 그걸 짜서 뭐하느냐"라고 "쓸데없는 짓 한다"라고 타박했지만 

극구 만류하지는 않았다. 

평소에 강건하셨던 어머님이셨기에 그렇게 황망히 세상을 떠나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스웨터가 서서히 모양을 갖추어 갈수록 

어머님 살아 계실 적에 입혀 드리지 못한 후회와 자책으로 가슴이 아팠다.

스웨터를 짜는 대바늘 끝에 올올이 어머님 모습을 엮어서  
사나흘 만에 팔 부분을 짜서 붙이고 고무단 뜨기로 테두리를 둘러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시내 단추 가게에 나가 보석이 박힌 예쁜 단추도 사다가 달았다. 
완성 해 놓고 보니 자주색을 좋아하셨던 어머님께서 입으시면 아주 잘 어울릴 텐데 하는 생각에 더욱 서운했다.

생전에 입으실 수 있도록 짜 드렸더라면 얼마나 흐뭇해하셨을까.


뒤늦게 짠 스웨터를 어머니 산소에서 훨훨 태워 드리고 돌아온 날 저녁, 
창밖으로 어둠이 드리우는 풍경을 내다보는데 뜨거운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무심하게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는데 문득 어머님이 타 주시던 그 달큼한 커피가 생각났다.
어머님은 가끔 내가 마시는 커피 잔을 넘겨다보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까짓 거 한 모금밖에 안 되는 거 뭐 마실 게 있냐" 하시며  
큼지막한 사발에 설탕을 듬뿍 넣어 달달한 커피를 만들어 주시곤 하셨다.  
큰 사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숭늉 마시듯 훌훌 불어가며 마셨던 그 특별한 커피. 
오늘은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그 달큼한 커피처럼 큼지막한 사발에 커피를 타는데
중국의 어느 시인이 인생의 변하기 쉬움과 늙음의 슬픔을 읊었다는 시 한 구절이 절절하게 가슴에 스며들었다.


낙양(洛陽) 성동(城東)의 도리화(桃李花)는 
낙화 져 날아가서 그 뉘 집에 떨어지는고
낙양의 젊은 여자 얼굴을 아껴
가며 가며 낙화 보고 한숨을 짓네
금년에 꽃 질 때 안색 변하고
내년 다시 꽃 필 때 누가 남으랴
송백(松柏)은 잘리어 장작이 되고
뽕 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거니
옛사람 이제는 성동(城東)에 없고
지금 사람들만 꽃바람 속에 서 있네.
'해마다 해마다 꽃은 같은데 (年年歲歲花以相)'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다르네 (歲歲年年人不同)’
말하노니 한창 시절 젊은이들아
가엾지 아니한가, 다 늙은 백두옹

“李元壽編 中國故事成語?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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