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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31. 2020

올케언니가 받은 촌지

25년 전을 회상하다.

어젯밤 잠자리에 든 늦은 시간에 셋째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25 년 전 제자와 저녁을 먹고 들어 왔다는 것이다. 

언니가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그 제자는 언니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셋째 올케언니가 충남의 작은 군 소재지의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신학기에 2학년 담임을 맡고 보니 유난히 얼굴에 그늘이 짙은 한 제자가 눈에 들어오더란다. 

축 처진 어깨에 주눅이 잔뜩 든 왜소한 모습, 수업 시간이나 종례 시간에 선생님과 눈을 맞추지 않는 아이, 

친구들과 어울릴 줄 모르고 외톨이처럼 동그마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아이, 

웃음을 잃고 늘 침울한 표정으로 세상 고통 다 끌어안은 듯이 불행해 보이는 아이. 

우선 가정환경을 파악해 보니 그 학생의 우울함이 이해가 되고, 그 학생이 가여워 가슴이 아프더란다. 

엄마가 암으로 세상 떠나고 일정한 직장이 없는 아버지가 막일로 떠돌아다니느라 

연로한 할머니와 단 둘이 어렵게 생활을 하고 있더란다. 

언니는 문득 돌아가신 시아버지(내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했다.

'이럴 때 아버님은 내게 무슨 말씀을 해 주셨을까?'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해답을 찾아낸 언니는 그날부터 그 학생에게 눈길을 주었다.

지나치게 관심 보이기보다는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학생에게 다가갔다. 

복도를 지나가다 만나면 툭툭 어깨를 두드려 주고, 사소한 심부름도 한 번씩 시키고, 

급식비를 못 내서 도시락을 싸오는 그 학생이 늘 싸오는 깻잎장아찌가 맛있다고 젓가락 들고 가서는 뺏어먹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빙긋이 웃어 주고, 딸의 속옷 살 때 그 학생 브래지어도 하나 사다가 넌지시 가방에 넣어 주고, 졸업한 제자 중에서 비교적 복장이 단정했던 제자에게 전화를 해서 여름 교복을 마련해 주고…. 

그렇게 한 달 가량 지나니까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던 그 제자가 마음을 열기 시작하더란다. 

서서히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간간히 웃기도 하고 곁에 친구와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모습도 보이고 

머리도 자주 감고, 복장도 깔끔해지고,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예전에는 슬금슬금 피하던 아이가 

저만치에서부터 달려와 먼저 인사를 하고 "선생님이 네 도시락 반찬 맛있다는데 우리도 한번 먹어 보자"며 

친구들과 반찬을 나누어 먹기도 했단다.


여름 방학이 다가 올 무렵, 퇴근을 하려고 막 교무실을 나서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 한 분이 

교무실 창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계시더란다.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누구를 찾아오셨어요?" 

올케 언니가 다가가서 묻자 그 할머니는 아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황급히 뒤로 감추시더란다. 

"우리 손녀딸 선상님을 좀 만났으면 좋겄는디유."  

"아… 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학생이 몇 학년 몇 반이지요?" 

"2학년 3 반이어유."  

"어머, 제가 2학년 3반 담임입니다. 누구 할머니세요?"  

갑자기 그 할머니께서 올케언니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어이구 선생님… 고맙고, 또 고맙구먼요. 

불쌍한 우리 손녀딸을 이쁘게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그 불쌍한 것이 작년에 지 애미 죽고 마음 붙일 데가 없어 말수도 없어지고 비쩍 말라가더니 

선상님을 만나고부텀 웃기도 허구, 밥도 잘 먹고…. 이 고마운 맘을 어떻게 혀야 할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손녀딸이 얘기해 줬구먼요. 선상님이 이걸 좋아하신다고 해서…." 

채 말끝도 맺기 전에 그 할머니는 손에 들고 계시던 검정 비닐봉지를 얼른 올케언니 손에 쥐어 주고는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달아나시더란다. 

더운 날씨에 먼 길을 오신 어르신께 냉수 한 컵 드릴 사이도 없이 할머니가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보다가 

손에 쥐어진 검정 비닐봉지를 열어 본 언니는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졌단다. 

그 검정 비닐봉지 속에는 깻잎장아찌가 들어 있었다.


나는 언니한테 촌지를 왜 받았느냐고 놀렸고, 

언니는 그 무더위에 오신 할머니께 시원한 물 한 잔도 대접하지 못한 걸 내내 마음 아파했었다.

그 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 간 후에 언니는 학교를 옮겼고

많은 세월이 흘러 오늘, 그 제자가 찾아와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 왔다는 것이다.

25년 전 얘기로 올케와 시누이의 수다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길어졌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촌지'를 생각하며 따뜻해진 마음으로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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