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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31. 2020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손님

아주 특별한 단골 고객 

남편이 부도 맞기 전, 오전 시간에 남편의 매장에 나가서 일을 도울 때의 일이다.
종종 장애를 가진 분들이 찾아오는 우리 매장에 그 날도 아주 특별한 손님이 다녀갔다.
단순한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얼굴이 온통 일그러지고 손이 뒤틀리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매장 유리 진열장 앞으로 다가온 그 청년은 메모지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mp3, 용량은 8G, 사용하기 편한 제품으로 추천 부탁드립니다'라고 가지런한 필체로 쓰여있었다.

누가 쓴 거냐고 물었더니 우리 형이 써 줬다고 말하며 그 청년은 배시시 웃었다.
내가 권장할 만한 제품 서너 개를 진열장에서 꺼내놓고 상세히 설명을 하려는데 

공교롭게도 다른 손님이 진열장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 청년은 황급히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잠시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이 손님 먼저 해 드리세요. 저는 바쁘지 않으니까 기다렸다가 천천히 볼게요"라고
말하는 청년은 혼신의 힘을 다 하는 듯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그날따라 점원이 몸이 아파 나오지 않는 바람에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계속 다른 손님들에게 밀려서 저만치 통로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 청년 커플을 

긴 시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매장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 커플에게 커피 한 잔씩을 시켜주고 나는 한 동안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간간히 내가 눈을 마주치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오히려 그 청년이 더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청년에게는 참고,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 보였고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마침내 내가 그 커플이 원하는 제품을 몇 종류 챙겨서 탁자 위에 놓고 설명을 시작했을 때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그때서야 가까이에서 눈여겨 살펴보니 그 청년의 옷차림이 참 정갈하고 단정했다.
곧게 다림질 한 셔츠와 빨아서 말려 놓은 운동화를 신고 걸 보니,
가족들에게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 청년이 뒤틀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여자 친구의 눈곱을 닦아주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곱을 닦아주며 그 청년이 내게 말했다.
"이 친구는 눈이 의안이라서 눈곱을 뗄 때는 조심해서 닦아야 해요" 
나는 그때서야 그의 여자 친구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대학 새내기인 내 작은딸 또래의 그의 여자 친구는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청년이 여자 친구를 가리키며 "이 친구에게 mp3를 선물하고 싶은데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것보다 직접 만져보게 해 주고 싶어서 매장으로 나왔다"라고 했다.
나는 그 청년과 그의 여자 친구를 앉혀 놓고 하나씩 제품 특성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었고, 
그 청년은 제품을 하나씩 여자 친구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의 여자 친구는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처럼 손으로 제품을 보는 듯했다.
내 설명을 그의 여자 친구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 청년은 여자 친구에게 세세하게 다시 설명해 주었고,  

음질을 비교해서 들어보고 싶다고 하면 이어폰을 연결해 여자 친구의 귀에 꽂아 주며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여자 친구가 똑같은 질문을 해도 짜증내지 않고, 소소한 궁금증에도 성의껏 설명해 주는 모습이 

참 따뜻해 보였다.
한참 시간이 흘러 그의 여자 친구는 제품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디자인이 예뻐서 제 맘에 꼭 들어요. 색상은 레드 계열이면 더 좋겠어요."

촉감만으로 제품의 디자인과 거기에 어울리는 색상까지 알아내는 감각이 경이로웠다.
볼 수도 없는데 디자인이 예쁜 건 어떻게 알았을까, 
볼 수도 없는 데 색상이 아무려면 어떠랴 생각했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미안했다.


제품을 판매할 때마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리고 또 그만큼 힘도 들지만 
장애인들이 내게서 제품 구매를 결정할 때마다 나는 기분 좋은 보람 같은걸 느끼곤 했다.
제품보다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내 매장을 나서면서 몇 차례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 물건을 팔아 줬으니 내가 고마울 일인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편견과 부당한 대우에 마음 고생을 했으면 

이처럼 작은 친절에도 감동하는지 마음이 짠했다.
한 손에는 제품이 담긴 쇼핑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심하게 몸을 기우뚱거리며 걸어가는 그 청년의 뒷모습은 조금도 흉하지 않았다.
그 청년이 느린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그 청년의 어머니가 존경스러웠다.
장애는 곧 고립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온몸이 뒤틀리는 아들을 저렇게 환하게 키워서 

세상 밖으로 내놓기까지 그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을까, 가늠이 되었다.


그 후 그 청년은 나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면도기를 사 가고, 드라이기도 사가고, 어느 때는 여자 친구와 커플링을 하려는데 

믿을만한 금은방을 소개해 달라고 찾아오기도 했다.
장애인들 사이의 입소문 때문인지 그 청년뿐만 아니라 남편 매장에는 장애를 가진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고객은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고객이었다.
필답만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소통에 한계를 느낄 때도 많았다.
어느 때는 전자사전 하나 사용법을 가르쳐주는데 4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으니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장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의 부족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고 도우며 살아가려는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불편한 장애는 아닐까. 
남을 먼저 배려해 주던 그 청년의 모습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욱 반듯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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