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정 Oct 31. 2020

너, 이 시간에 여기는 왜 왔어?

장맛비속에서 아버지의 산소에서 만난 오누이.

오랜 가뭄으로 비가 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요즈음이다. 

그나마 오늘은 먼지잼할 만큼 여우비를 뿌려 아스팔트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여름이 오면,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했던 그 여름의 장맛비가 생각난다.  
그 해 여름, 일기예보에서 본격적인 장마철에 접어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아버지 산소가 걱정되었다. 
장마가 시작된 지 사나흘이 지날 무렵, 

우려했던 대로 집 앞까지 천둥을 데리고 온 빗줄기가 밤새 쉬지 않고 퍼부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굵은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잠들지 못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서성거렸다.
무서운 기세로 퍼붓는 빗줄기는 아직 잔디가 뿌리내리지 못해 황토 봉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아버지의 산소를 기어이 쓸고 내려갈 것만 같았다. 


새벽 4시가 지날 무렵, 나는 서둘러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잠든 남편을 깨웠다.
"여보, 나 아버지한테 잠깐 갔다 올게요. 

당신 출근 시간 전에는 올 테니, 애들 아침밥 좀 챙겨 먹여서 학교 보내세요."
잠결의 남편이 부스스 눈을 뜨면서 "이 빗속에 어딜 가느냐"고, "차라리 내가 갔다 오겠다"는 걸 뿌리치고 
태풍을 동반한 빗속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악천후였다.
평소에는 30분이면 족히 가 닿을 수 있는 거리를 1시간이 넘어서 겨우 도착했다.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물이 범람하는 논둑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논둑길을 덤벙덤벙 가로질러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자꾸만 엎어지고 넘어졌다.
동짓달에 아버지를 산으로 모실 때 포크레인이 지나간 비탈길의 찰진 진흙이 

어찌나 미끄러운지 몸을 일으킬 수 조차 없었다. 

세찬 바람에 망가진 우산을 팽개치고 네 다리로 기어오르다, 주르륵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다 미끄러지는 진흙길이 야속하기만 했다.

비탈길 가장자리의 풀포기를 붙잡고, 나무뿌리나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참을 실랑이 한 끝에 

겨우 기어올라 산 중턱 아버지 산소에 다다랐는데, 나는 그만 기절할 듯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 누가 있는 게 아닌가?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빗줄기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아버지 산소 봉분 앞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얼굴에 쏟아지는 빗물을 훔쳐내며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 셋째 오빠였다. 

순간, 울컥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오빠!"
빗소리에 듣지 못하였는지 오빠는 두 손으로 아버지 무덤 봉분만 다독거리고 있었다. 
내가 바짝 다가가서 다시 한번 부르자 그때서야 오빠는 내 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너, 이 시간에 여기는 왜 왔어? 운전도 서툴면서 이 빗속에?" 

오빠의 말끝이 흐려졌다. 
우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주 서서 황토흙과 빗물이 범벅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이 태풍 속을 뚫고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오빠는 알고 있었고, 
이른 새벽에 오빠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오빠는, 태풍이 온다고 해서 며칠 전에 지물포에서 큼직한 비닐을 사다가 

아버지 산소의 봉분을 덮고 돌로 단단히 눌러 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밤사이 태풍이 심상치 않아 출근하기 전에 다시금 올라 와 봤더니, 
짐작했던 대로 비닐은 이리저리 날아가 버리고 겨우 뿌리내리기 시작한 잔디가 

세찬 빗줄기에 쓸려 내려가고 있더란다.
오빠와 나는 아버지 산소의 봉분에 쓸려내려 간 잔디로 패인 자리를 단장하고  

날아가 버린 비닐을 주워다가 아버지의 집을 덮었다. 
아버지 손, 발 시리지 않게 내가 비닐 가장자리를 꼭꼭 여미어 잡고 오빠는 삽으로 흙을 퍼다가 단단히 눌렀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우리 일곱 남매에게 아버지는 가슴 아린 아픔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눈물이고 그칠 줄 모르는 그리움이다. 
가난한 농부이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오직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사셨다.
여름이면 농사일이며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겨울이면 가마니 짜는 일에 밤잠을 잊으셨다. 
거친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느라 아버지의 손끝은 늘 갈라져 하얀 반창고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도 피우지 않으셨고 동무들과 어울려 술 한 잔 나누는 일도 없으셨다. 
그렇게 늘 일속에 파묻혀 사셨던 아버지의 가없는 사랑과 희생은 일곱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내셨다.
아들, 딸 차별하지 않고 공부시키시는 아버지를 보며 "내가 성공하면 아버지께 효도하리라" 늘 벼렸는데, 

정작 자식들이 성공했을 때 아버지는 떠나셨다.

나에게 자식 노릇 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 짧게 주신 아버지가 야속하지만
아버지의 큰 사랑은 자식들의 가슴에 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리고 장맛비가 시작되면, 25년 전 태풍 속을 뚫고 기어오르던 그 비탈길과 
장대비 퍼붓던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마주 섰던 셋째 오빠와 내 모습이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이전 05화 아버지와 국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