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 김이분

by 하늘위로

그날은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바람까지 불자 든든하게 비를 막아주던 우산은 그저 장식품이 되었다. 우산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허우적거리자 이번엔 그 우산을 간신히 잡고 있던 할머니의 몸이 들썩거렸다. 바람 따라 휘청휘청, 빙글빙글 할머니는 아슬하게 지면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몰아치는 비바람의 공격에, 할머니는 더 버티지 못하고 그만 다리가 구부려졌다. 이대로 넘어진다면 큰 부상을 피할 수 없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젊고 튼튼한 손이 나타나 할머니 몸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었다. 체격 하나는 좋은 늘봄 주유소 아르바이트생 이은아였다.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우산은 거꾸로 뒤집혔고 옷은 다 젖어버린 정신없는 와중에도 할머니는 고마움의 표시를 잊지 않았다. 은아의 퇴근시간이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퇴근하면서 할머니를 발견하고 우산 펼칠새 없이 급히 달려 나왔던 은아 역시 비에 흠뻑 젖었다. 그 사이,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뭔가를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은아의 목소리도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은아는 손에 든 장우산을 힘껏 펼쳤다. 튼튼하고 큰 우산이다. 은아와 할머니 모두 우산 아래로 쏙 들어갔다.


은아는 괜찮다는 할머니를 겨우 설득해 할머니 집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할머니 집은 은아네 집 방향에 있었다. 다락 정도는 있는 듯한 단층의 단독주택, 담벼락은 장미 넝쿨, 그곳은 은아가 자주 지나치던 곳이었고, 할머니를 만나기 전부터 은아의 기억 속에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가 주신 타올로 몸을 닦으며 여쭈어보았더니 할머니가 딱 은아 나이였을 때부터 이곳에서 계속 살아왔다고 했다. 주위는 많이 변했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집은 안 판다는 할아버지의 고집 덕에 오십 년도 넘게,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집 주위엔 아파트나 빌라, 고층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덕분에 할머니네 집은 충분히 넓음에도 작고 아담해 보였다. 담벼락도 높고, 나무도 많아서 집은 마치 작은 요새 같았다. 마당과 담벼락 집 앞 화단은 꽃들로 가득해서 집 전체가 거대한 화분처럼 보였다. 그런 특징 때문인지,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은아를 위해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주었다. 둥굴레의 구수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하늘은 빠르게 어두움을 끌어안았다. 은아는 이제 그만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다 문득 궁금해졌다. 집에서 묘하게도,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쓰는 일상적인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나와있는 신발도 없구나 싶다.


"할머니, 여기 혼자 살고 계시는 거예요?"

"아니, 할아버지가 있어."

"아, 아직 퇴근 전이신가 봐요. 할아버지께선 정정하신가 봐요. 아직도 일하시고..."

"아니,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

"네? 그러면 병원에..."

"아니, 저 방에 있어, 유골함에."

"!"

"정정하셨는데 칼에 찔렸어. 어떤 이상한 사람이... 이유도 없이 할아버질 찔렀어."

"아, 죄송해요. 힘든 기억 떠올리게 해 드려서..."

"아니, 자네가 왜 미안해, 잘못은 다른 이가 했는데. 오늘 덕분에 비를 피해 집으로 왔네. 고마운 사람에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니에요. 저는 괜찮습니다."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 봐요. 고마웠어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은아는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장우산을 들고나간 딸이 비에 흠뻑 젖어와 놀란 엄마의 질문을 뒤로하고, 은아는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샤워부터 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실 때 할머니 눈이 매우 슬퍼 보였다. 나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는데 말이다. 매일 몇 번씩이나 주유소 앞을 산책하시는 거냐고, 다리에 무리 가지 않느냐고 여쭤보고 싶었는데 정작 묻고 싶었던 말은 꺼내지 못했다.


은아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오래전 뉴스를 떠올렸다. 힘없는 노인을 향한 잔혹한 묻지 마 살인, 벌써 10년도 더 된 사건이다. 바로 집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곧이어 들린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은아에겐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 여파로 한동안 보호자들은 자녀들을 데리러 학교 앞에 출동하게 됐다. 그 후로는 이 근방에서 그런 사건이 없었으니 빙글빙글 할머니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아마도 그 사건 때문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