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근 30년 이상을 뚜벅이로 지냈지만 그다지 큰 불편함 없이 잘 살았었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자가용이 필요한 시점마다 참 운 좋게도 어떻게든 잘 넘어가거나 나를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좀 있었는데 대부분은아빠가 출근길에 학교까지데려다주시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같은 학교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 돈을 나눠내며 함께 택시를 타고 등교하곤 했다.
대학교입학 후 신입생 때는 같은 지역에 사는 고등학교 선배이자 과선배 언니가 "모닝"이란 차를 새로 뽑았었다. 초록색 자동차, 멀리서도 아주눈에 확 띄는색깔의 차를 타고 신나게 운전하고 다니던 그 선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록 차는 모닝이었지만 운전하는 모습은 마치대형 트럭을 끌고 다니듯 아주 터프하게 운전하였던 그녀였다. 어쨌든 선배는 자기도 혼자 운전하고 가면 심심하기도 하니같이 타고 다니자며 후배인 나를 태워주었다. 그렇게 언니와 즐겁게 등하교를 같이 하며 나의 신입생 시절이 흘러갔다.
"집에 가지? 같이 가자!"
그 이후에는 과에서 또 다른 선배와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고맙게도 그들은 뚜벅이인 나를 늘 챙겨주었다. 난 그들 덕분에 남은 대학교 등하굣길도 아주 편히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을졸업하고 나서는 무척이나 친한 친구의 소개로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그 친구가 또 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나름 장거리 연애인데도 그 덕분에 우린 별 어려움 없이 만남을 잘 이어갈수 있었다.
직장생활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모든 직장은 아니지만 몇몇 직장에서 운 좋게도 같은 동네에 사는 좋은 동료들을 만나 그들이 가능한 날은 퇴근길에 집 근처에 곧잘 내려주곤 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차가 없이도 운 좋게 만나게 된 좋은 인연들 덕분에 어찌저찌 뚜벅이의 불편함을 크게 모른 체 잘 지낼 수 있었던 것같다. 다시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들이다.
2.
서른이 넘고 이직하면서 새로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실제로는 얼마 안 되는데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려다 보니 환승에, 버스 대기 시간까지 모두 포함하면 편도만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것이었다. 차라리 먼 곳이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가까운 거리를 길거리에 시간을 버려가며 비효율적으로 다니다 보니 왔다 갔다 지치기도 하고, 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몹시 들었다. 때마침 친한 친구가 곧 새 차를 구매할 예정이라며 자신이 타던 차를 나에게 사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너무 아끼는 차라 다른데 보내기도 그러니 너도 차 필요할 것 같고 차라리 내가 샀음 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30대에 난생처음으로 뚜벅이에서 벗어났다.
처음에 뚜벅이가 직접 차를 몰고 다니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시간 단축이었다. 전에는 버스 환승하고, 기다리고, 집까지 무려 1시간 걸리던 것이 차로 운전해서 가니 15분이면 뚝딱인 것이었다.
여름엔 날도 덥지만 더위를 워낙많이 타는 탓에 쫌만 걸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달아오르기 일쑤였는데 차가 있으니얼굴이 빨개질 일도 전혀 없었다.
겨울은 말해 뭐해. 집에 있는 어그부츠는 더 이상 불필요한 물품이 되어버렸다. 차 없을 땐 그저 몸이 나의 이동수단이다 보니 두꺼운 패팅, 어그부츠, 장갑은 필수였다. 하지만 차가 있으니그런 도구들 따윈 다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적당히 걸쳐 입고 이동하는 동안엉따와 히터만 켜면 춥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했다.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가 생기면서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출산 후 몸조리하고 아이를 보다 보니 도통 나갈 일이 없었다. 그렇게 내차는 점점 주차장에서 전시품이 되어가는 듯했다. 게다가 그런 생각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엎친데 덮친 격 코로나까지 터졌버렸다.
알다시피 당시엔 나가면 무조건 위험하다 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외출에 대한 두려움도 컸고 아이가 어려 바이러스라도 옮을까라는 염려에 나의 집콕 생활은 더욱 길어졌다. 그렇게한 2년이 지났을까?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 차 그냥 팔자. 어차피 차가 작아 아이 태우고 다니기도 위험하고 한동안 쓸 일도 없으니 일단 팔고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사자. 이동할 일이 있으면 그때 차라리 택시를 타."
난 몇 번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 어차피 당장 일도 안 하고 한동안은 코로나로 외출도 힘들 것 것 같으니일단 팔자'
3.
그렇게 나의 뚜벅이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다행히 집 근처에 아이 병원과 편의시설이 있어 차 없이 다니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다니게 된 아이 어린이집도 바로 집 앞이라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시간은흘러 어느새 아이는 5세가 되었고, 유치원에 입학을 하였다.
이제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유치원은 전에 코 앞에 있던 어린이집과 달리 15분~2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학기초엔 아이 적응시킨다고 데려다주곤 했는데 왔다갔다 왕복 포함하니 약 1시간 정도를 걷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산책을 좋아하는 아이 탓에 거의 매일 유치원 하원 후 약 1시간, 혹은 그 이상을 둘이 같이 걷고 놀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두 달쯤 지났을까?출산 이후 발바닥 통증이 있었는데 한동안 없었던 통증이 최근 들어 더 심해진 것이다. 나름 걷는 것을 좋아했던 나인데 발이 자꾸 아프다 보니 그만 걷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이와 집에서 거리는 좀 있지만 주마다 정기적으로 꼭 방문해야 하는 곳이 있었다. 다행히 집 앞에 버스노선이 있었기에 상황이 될 때마다 아이와 같이 버스를 타곤 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것까진 좋으나 버스는 정류장까지 가야만 탈 수 있으며 매번 거기서 버스가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스 오는 시간에 맞춰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아이 아빠는 이러한 문제로 택시 타기를 권했으나 굳이 그곳까지 가는 노선이 있는데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기에 난 가능하면 버스를 이용하려 했다.
이게 혼자 다니거나 어른인 나는 괜찮은데 아직 5세밖에 안된 아이가 정류장까지 가고 내리며 걷는 거리, 버스 오는 시간에 때맞춰 나가거나,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타려는 버스는 배차시간이 워낙 긴 탓에 매번 시간 계산을 하고 그 시간에 못 타고 놓칠세라나갈 때마다 난 아이에게 "빨리, 빨리! 뛰어, 뛰어!"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그곳에 가는 날이 올 때면 맘부터 편치가 않았다.비록 아이는 그 와중에 버스 타는 것을 매우 신기해하면서도 좋아했지만 말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릴 때가 다됐는데도 졸고 있는 아이를 겨우 깨워 정신없이 내리는일도빈번했다.
그때마다 내머릿속에 떠 오르는 건 단 한 문장이었다.
"아. 이건 아니다. 차를 사야겠다.'
이제곧 여름에, 장마에... 아침마다 아이 유치원 등원은 어찌할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엄마는 머리가 아파온다. 아침 유치원 셔틀을 태울까도 했지만 노선상 우리 집 앞엔 어찌 그리 버스가 일찍 오는지 아이가 늦잠 자서 놓치는 날이 부지기 수였다.
잠시 뚜벅이의 생활을 돌이켜 본다.
강제 운동이지만 몸에 좋은 걷기 운동도 되고, 아이와 동네 이곳저곳 구경하고 돌아다니며 숨은 명소도 찾아볼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에겐 걷는 길마다 새로운 곳이다. 걸어가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나 나뭇가지들도 줍고, 바닥에 굴러 떨어진 도토리도 발견해서 줍고, 줍다 보면 그 옆에 줄줄이 모여있는 개미들을 발견하고 또 그것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즉, 뚜벅이만의 장점이 있단 말이다.
거기다 더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차를 구매하는 것보다 걸어 다니는 것이 훨씬 더 절약되며, 환경오염적인 측면에서도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동안 아주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누렸던 그 뚜벅이만의 모든 장점은 잠시 모두 넣어두고 불필요한 시간 절약과 효율적이고 편안한 아이와의 이동을 위해 뚜벅이 생활을그만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제차를 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