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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04. 2021

지혜로운 아홉 살


"벌써 목요일이다. 시간이 정말 후딱 지나가는 것 같지 않니?"

"아니요! 너무 느리게 지나가요!"

"그래? 너희들이랑 선생님이랑 시간이 다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지 알아?"

"왜요?"

"어린이들은 매 순간의 작은 일들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에 담는대. 하나하나의 수많은 기억들이 연결되며 시간이 흘러가니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대. 그런데 선생님같이 나이가 든 어른들은 꼭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한대. 그래서 몇 가지 기억들만 연결되며 시간이 흘러가서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것 같은 거래."


주말권으로 성큼 접어든 목요일 아침. 시간의 빠른 흐름이 새삼스러워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다. 마지막 말에 아이 하나가 다른 반응을 한다.

"저도 일주일이 빨리 지나갔어요!"

아이는 어른의 시간 흐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만 흐르는 것 같았던 어린아이였을 때는 언제나 어른이 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어른이 되는 여정은 멀고도 아득하기만 다. 그 먼 길을 슬로모션으로 가야만 한다는 현실 자각에서 오는 망연함. 그땐 선생님도 너희들처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 좋으냐고 너희들이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뭐든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있는 너희들 앞에서 답을 몰라 난처해진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울 것 같아서. 하루하루 성장하는 너희들이 나아갈 방향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면 그 길이 정말 멋진 길이라고 격려해야 할 텐데, 마음껏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그래도 그 길이 꼭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먼저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좋은 본이 되어주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사람인지 못 미더워서. 

많이 부족하지만 너희들 앞에서는 충만한 어른의 모습이길 바라며 일주일을 달려왔다.


아이들과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알아보는 단원을 공부 중이다. 가고 싶은 나라의 이름을 풍선에 써서 보자기에 띄우며 친구들과 반환점을 돌아오는 놀이를 했다. 이름하여 '세계 여행 놀이'. 코로나 시대에 세계 여행은 너무 먼 꿈같은 일이 되었지만, 가고 싶은 나라를 새기며 가상으로 떠나보는 세계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놀이 후 아이들이 써낸 글에서 아이들의 생각을 읽고 배움을 들여다본다.


4교시에 여행 풍선 놀이를 했다.
하는 방법은 보자기에 풍선을 넣고 떨어지지 않게 하고 제자리에 돌아오기인데 떨어지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팀은 2팀이었는데 1팀이 12점, 우리는 5점, 3팀은 5.5점이었다. 우리가 졌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괜찮았다. 1팀에게 박수를 쳐줬다.


<아쉬운 여행 풍선 놀이>라는 제목의 선희(가명)의 글이다.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이것이 이 아이들과 만난 3월에 다짐했던 담임으로서의 나의 한 해 목표였다. 나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선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면 참 좋겠다. 선희는 이미 과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아이이긴 하지만 말이다.

진 팀이 이긴 팀에게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여유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결과에 의연할 수 있는 법. 선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었다. 장하다.


오늘은 세계 여행 놀이하는 날이다. 강당에 가서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 팀은 00, 00, 00...이었다. 우리 팀은 계속 꼴등으로 왔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괜찮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풍선(놀이 재료)은 (놀이를) 제일 잘 한 사람에게 주는 거여서 다 00 이에게 투표했다. 그래서 00 이가 (풍선을) 받았다. 왜 00 이가 받았냐면 다른 팀과 부딪히면 미안해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짜증도 안 내고 싸우면 말리고 그래서 00 이가 받았다.


<세계 여행 놀이하기>라는 제목의 찬우(가명)의 글에서 찬우 역시 최선을 다한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 준다. 계속 꼴등을 해도 최선을 다한 자신을 보듬어 안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관대할 수 있다. 비교를 통해 자신이 이룬 성과를 평가절하하지 않는 사람은 보다 공정한 잣대로 다른 이를 판단할 줄 안다. 그래서 팀에서 최선을 다하 팀원들에게 열심히 하도록 용기를 준 팀의 MVP를 뽑으라는 말에 그런 친구를 뽑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평가는 어른들의 평가보다 냉철하고 공정하다. 어떻게 행동하는 친구가 팀에서 MVP가 될지 판단한 근거 얼마나 적절한가. 이러한 판단이 찬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더 큰 기쁨이 있다. 어떤 행동이 모두에게 이로운지 아는 아이들은 스스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 노력할 테니까.


나는 이 놀이가 '세계 여행'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또 다른 정보를 얻었다. 내가 옛날에 게임을 할 때, 친구들과 협력을 안 했더니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협력을 잘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또 다 이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엔 우리 모둠이 1등이었다.


<협력이 중요하다!>는 제목의 수영(가명)이는 1등을 하고도 마냥 우쭐해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1등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었는지 이유를 살피고 거기에서 배움을 얻는다. 아홉 살 인생에서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는 태도는 웬만한 어른보다 성숙하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협력을 잘해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아는 아이는 앞으로도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찾을 테니, 수영아, 너는 멋진 여성으로 성장할 거야.

다른 사람들과 협력한다고 매번 이기는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어린이라면 충분히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이들의 글을 보니, 좋은 어른의 본을 보이기 위해 어쭙잖게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되겠다. 내가 할 일이라는 건, 그저 아이들 속에 있는 선한 면을 들여다보고 감응하여 더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잘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알게 하는 것. 등수에 상관없이 함께 한 친구들과 과정을 오롯이 즐기도록 하는 것. 이런 것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배울 만큼 아홉 살들은 지혜롭다.


2학년 세계 여행 놀이. 이렇게라도 세계 여행 가 보자~^^ by 그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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