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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un 09. 2021

오늘도 선생님은 내 글을 '패스'하셨다

아이들의 글을 고르게 보려는 교사의 노력이 필요하다


매주 수요일은 '전학공'이 있는 날이다. '전학공'은 '전문적 학습공동체'의 약자로 교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배움을 나누는 학습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 학교는 규모가 커서(50 학급) 학년별로 전학공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동학년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나눔 할 수 있는 배움의 주제를 선정하고 준비해 운영하고 있다. 올해 동학년 선생님들이 워낙 경력도 많으신 데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들이라 매주 전학공 시간이 끝날 때면 모두들 눈밑 다크서클이 한층 짙어진다.


"우리, 너무 진지해."

"오늘도 너무 많이 배웠어."

"다음엔 좀 더 가벼운 걸로 합시다!"


오전 수업을 다 하고 난 후 이어진 '너무 진지한' 배움의 시간에 대해 투정 섞어 투덜거리곤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반 선생님이 배우는 자리에 빠지고는 못 사는 우리, 천상 '선생'들이다.


오늘은 '글쓰기로 함께 하는 삶의 대전환'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동학년 전학공이 이루어졌다. 한 주제씩 돌아가면서 맡아 진행하는 방식이라 달리 큰 재주가 없는 내가 맡은 주제였다. 브런치 작가라고 글쓰기에 대해 뭔가 반짝이는 배움을 나눠 주리라 기대할 동학년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글쓰기 관련 책을 뒤적이고, 틈틈이 메모해 둔 자료를 들여다보며 공유할 자료를 ppt로 만들다가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해 오하면 되지,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앞섰구나. 너, 또 상대가 원하는 것은 들여다보지않고 네가 전달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있구나.


교사들은 무엇을 배우던지, 당장 내일의 수업에 활용 가능한 배움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물론 10년 후 자신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의 새로운 배움을 천천히 음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선생에게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당장 '내일의 수업'이다. 오늘 접한 일이 내 반 아이들에게 무척 유용한 것이고, 내일 당장 사용 가능한 것이라면 눈이 '번쩍'이는 게 선생들이다.


최근에 들은 온라인 글쓰기 연수를 바탕으로 좋은 글쓰기와 아이들의 글을 제대로 보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다른 전학공 시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선생님들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튀어나왔다. 


"아이들 글을 언제 읽어주세요?"

"그럼, 선생님은 반 아이들 글쓰기를 정기적으로 지도하시요?"

"아이들 글을 어떻게 고쳐 주나요?"


선생님들의 질문을 바탕으로 평소 내가 아이들의 글을 대하며 생각하는 기본적인 두 가지를 나누었다.


잘 쓴 글과 잘 쓰지 않았더라도 한 번도 읽어주지 않은 글 함께 읽어주기

아이들은 교과서의 글보다 친구의 글을 보며 더 많이 배운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글을 읽어줄 때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하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자발적으로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잘하는 아이의 글을 보며 잘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주눅 들게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잘 쓴 글과 잘 쓰지 못했더라도 한 번도 읽어주지 않은 글함께 읽어주고 있는데, 얼마 전에 우리 반 한 아이의 글쓰기 공책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오늘도 선생님은 내 글을 패스하셨다."


2학년 아이의 글 첫 문장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나름 신경 쓰면서 돌아가며 읽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안 읽어준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첫 문장은 이날 쓰기로 한 주제와 동떨어진 이었지만, 아이의 온 마음은 이 한 문장에 모아져 있었다. 대오각성하고 다음날 이 아이의 글을 제일 먼저 읽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일주일에 두 번 글쓰기를 하니,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전날의 기억은 다음 날의 새로운 사건(?)으로 덮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틀 후 쓴 이 아이의 글 첫 문장은 이러했다.


"우와! 드디어!!!!!!!!!!!!!!!!!!!! 우와~우와~우와~!!!!! 선생님이 내 글을 읽어 주셨뜨아!!!!"


이 아이에게 느낌표는 한 번만 쓰는 거야, 같은 말은 되도록이면 반복하지 말도록 하렴, 맞춤법을 맞게 써야지, 같은 말들은 개나 줄 말들이다.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글, 이보다 정직하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가?


파블로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고 했다. 내 심장을 얼마나 주물러야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말랑말랑하게,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이의 글을 되도록이면 훼손하지 않고 수정하기

3월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고, 친구들의 잘 된 글도 수시로 읽어주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떻게 쓰는 것이 자세히, 솔직하게 쓰는 것인지 '감'을 익혔다. 물론 더 나은 글도 있고, 감을 찾아가는 중인 울퉁불퉁한 글들도 많지만, 글이라는 바퀴를 굴려 가다 보면 조금씩 모난 곳이 매끄러워질 거라 믿는다. 그럼에도 감을 못 잡고 오래도록 나아가지 않는 아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현민(가명)이의 글쓰기 첫 문장은 90%가 '오늘은 학교에 갔다.'로 시작한다. 1~2줄 쓰기, 5줄 이상 쓰기, 7줄 이상 쓰기를 단계적으로 연습해 왔는데도 현민이의 글은 여전히 3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민이의 글쓰기를 업그레이드시킬 시점이다.

오늘 아침에 현민이를 조용히 불러 현민이의 글을 우리 반 글쓰기 공부 자료로 사용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네?" 현민이는 선생님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현민이 글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친구들의 글쓰기 공부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서야 긍정의 끄덕임을 해 왔다.


<현민이의 글>

6월 0일
오늘은 학교에 갔다. 바다 풍경을 그렸다. 도화지에 바다 속을 그렸다. 물고기를 색칠해서. 물고기를 바다에 붙였다. 어려웠다. 물고기가 예뻤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현민이의 글을 읽고 반 친구들이 글로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친구의 글을 보고 질문할 때는 틀린 부분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궁금한 것만 질문하기로 아이들과 미리 약속했다.


"왜 그림을 그린 거야?"

"너는 어떤 물고기를 골랐어?"

"너는 물고기를 어떻게 색칠했어?"

"너의 물고기 이름은 뭐였어?"

"뭐가 어려웠어?"

"왜 기분이 좋았어?"


아이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현민이는 자신의 글에 대해 친구들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질문에 대해 조금씩 정보를 흘려주었고, 나는 현민이가 점프한 글쓰기의 공간을 현민이의 입에서 나온 말과 표현으로 채워주었다.

현민이의 본래 글에서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어순이 바뀌거나 맞춤법을 아무 곳에나 찍는 것 등)은 따로 언급하지 않고 현민이의 입으로 고쳐진 듯이 자연스럽게 고쳤다. 그러자 현민이의 글이 아이들이 보는 눈 앞에서 쭉쭉 길어졌다. 마지막에 글에 어울리는 제목을 현민이에게 지어 보라고 했더니 '바다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현민이의 제목과 아이들이 지어준 제목, '이게 바다 풍경이라고?'를 함께 적어 주었다.

교사가 "길게 써 봐."라고 말할 때는 '길게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현민이가 다음 글쓰기 공책에 어떻게 쓸지 기대 너무 크게 하면 실망이 크겠지? 아이들은 울퉁불퉁해지면서 발전한다는 사실, 잊지 말자. 다음에 얼마나 잘 써오나에 초점을 두지 말고, 이전의 글보다 얼마나 울퉁불퉁해졌는지 기대하자.


아직은 멀고 먼 아이들과의 글쓰기 여정.

수레바퀴 끌 듯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며 천천히 가다 보면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글 멋쟁이' 되는 날이 오겠지. 아이들을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나도 뒤처지지 않게 바짝 따라가며 글똥을 잘 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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