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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Aug 11. 2023

나룻배의 꿈과 한쌍의 연인

누가 그림의 주인공일까요?


"다음은 무슨 그림 그릴까?"

여태까 가정에 돈이 붙지 않은 이유가 남의 집엔 하나씩 있다는 '해바라기' 그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계시라도 받은 듯한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는 현관문에 비치할 큼지막한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지요. 몇 달의 작업 끝에 마침내 그림이 끝나가던 날, 아내는 남편에게 또 한 번 물어봅니다.


특별히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시작하지 않은 일이어서인지 아내는 그리고 싶은 소재에 대한 영감이 가끔 떠오르고 자주 고민입니다. 결과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몰입하기를 즐기는 아내와 아내가 가져오는 결과물이 목적인 남편 중 누가 그림에 대한 소재를 더 잘 찾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 더 많은 레시피를 내어놓더란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몇 달에 걸쳐 해바라기만 덧칠하며 무념무상이던 아내의 상상력에 자극을 불어넣는 건 남편의 몫입니다.

"강이나 호수에 떠 있는 배, 멀리 육지나 산이 보이는 풍경으로 그려줘."

남편은 여지없이 다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매우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아내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장면이 몇 개 떠오르긴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그림을 그릴만한 실력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아내가 보고 그릴만한 사진이나 그림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남편은 호수와 배, 나루터와 강, 산 등이 있는 몇 개풍경을 보내옵니다.

"근데 이 그림 완성되면 어디 걸 건데?"

"침대 머리맡에."

"왜?"

"가보고 싶어서."


남편은 그런 사람입니다. 거실 소파에 거의 누워 있다시피 세상 편한 자세로 세계 여행을 인간형이지요. 별별 콘텐츠가 넘쳐나는 너튜브 세상엔 없는 것이 없잖아요. 남편은 요즘 여행 유튜버인 'Joe'님과 온 세상을 누비고 다닙니다.

신박한 내용이라도 보는 날엔 귀찮아하는 아내에게 꼭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열과 성을 다하여 내용을 전달하는 남편의 정성에 아내도 몇 번 함께 보기도 했다지요. 그러다 남편이 유튜버 Joe님의 여행 콘텐츠가 마음에 드는 것인지, 여행지마다 인물은 바뀌지만 꼭 함께 등장하는 미녀가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리송해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를 여러 번. 사람 많은 곳,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에게도 공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태곳적 야생의 기질이 저 무의식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기는 하나 보구나, 싶어 아내는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그렇게 Joe님과 너튜브 여행을 다니다 보니 여행의 피로라도 누적되었는지, 이제 잔잔한 호수와 배가 있는 고즈넉한 풍경을 머리맡에 두고 여유롭게 바라보고 싶으시다니, 참 남편의 방구석 여행 편력도 무궁무진합니다.


아내는 어느새 남편이 보내온 몇 장의 사진 중 마음이 끌리는(실은 제일 따라 그리기 쉬운) 사진 하나를 택해 망망대해 같은 하얀 캔버스에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하고 밑색을 깔아 나갑니다. 빈약한 아내의 상상력 대신 영감을 떠올려주는 게 어디냐고, 언제나처럼 긍정의 화신이 되어 아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칠한 데 덧칠하며 그림의 형체를 잡아가는 과정 말이지요.


연일 폭염으로 이글거리는 여름 한복판에서 멀리 설산이 보이는 고즈넉한 호숫가에 정박해 있는 두 척의 배가 완성에 가까워질 즈음, 그림 우측의 남녀 한쌍이 골칫거리였습니다. 사진에는 워낙 작게 나와 있어서 그림자처럼 블러 처리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는데 크기가 있는 화폭에 옮기다 보니 작게 처리할 수 없는 비율로 커져버린 것이었지요. 작은 점인 듯 찍힌 사진을 핸드폰 화면 키우듯 손가락 대칭으로 키울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지요.

대충 희미하게 블러, 비슷하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 원생의 마음은 모르시고 미술 선생님은 자꾸 그 부분에 대해 아내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셔서 아내를 곤란하게 하셨지요. 그러다 아내에게 인물 묘사에 더 보일 재주는 커녕, 성의마저 바닥났음을 마침내 눈치채셨는지 선생님은 한쌍의 연인이 탄 배만 좀 더 형체를 바로잡아 마무리하라 하셨답니다. 덕분에 연인이 탄 나룻배는 처음보다  늘어난 비율에 존재감이 생각보다 커져 버렸다지요. 처음엔 아련한 배경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뭔가 특별스토리를 담고 있을 한 한쌍의 남녀가 되어버렸습니다.


분명히 그림에서 가장 중심은 선착장에 줄로 매인 채 정박해 있는 두 척의 배, 그중에서도 중앙에 있는 배일 텐데... 시선의 방향에 따라 중심이 달라지는 것은 아내만의 착각일까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서히 시선이 이동되며 정박해 있는 배보다는 한쌍의 남녀를 담고 노질해 나아가는 오른편의 작은 배에 시선이 가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손댈 곳을 모르겠나이다, 그림을 이제 떠나보내고 싶나이다... 를 그렇게 내비쳐도 미술 선생님은 다음에 한 번 더, 를 그렇게 주장하셨나 봅니다. 다음에 정말로 그림을 끝낼 때, 한쌍의 남녀를 지금보다 더 멋지게 완성할 수는 없더라도 아내는 그 나룻배 속에 젊은 시절의 남편과 아내를 몇 번은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으니, 그쯤 되면 아내 마음속의 풍경은 완성이라 할만하겠지요.


남편은 아내가 그림을 그리며 머릿속에 그려내던 다른 그림을 알리가 없습니다. 그저 사진과 무엇이 비슷하다는 둥, 어느 부분이 좀 아쉽다는 둥, 아니면 실제로 이런 곳에 가고 싶다는 둥... 아내가 머릿속에 그린 그림과는 다른 말을 하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남편이 던져준 소재 덕분에 아내는 더위를 잊고 설산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하는 나룻배의 꿈에 폭 빠졌었으니까요. 서투른 그림이 완성되어 침대 머리맡에 놓이면 아내의 머릿속에서 내내 펼쳐지던 나룻배의 꿈에 대해, 한쌍의 연인이 담고 있을 스토리에 대해 남편도 조금은 다른 상상을 해 보기를 아내는 바라봅니다.


박민규 작가님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언급했듯, 시시한 우리들의 삶이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길 바라면서요.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진 않았지만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신 거란 말씀에 참 위안이 되었지요. 작은 나룻배에 함께 앉은 연인 남은 여생이 다소 시시할지라도 서로에게 존재하던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더 상상하며 밝혀주면  테니요. 



<나룻배의 꿈과 한쌍의 연인> by 그루잠이었던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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