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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27. 2023

'해봐'가 '하지 마'를 이길 때 만나는 것들


종일 눈이 올 거라고 했다. 10cm는 쌓일 거라고. 그러니 응당 겁을 먹으라는 신호였다.


지인들과 함께 산행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전부터 잡은 다른 날짜들이 있었지만, 개개인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두 차례 연기하다 이번엔 절대, 무조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꼭, 가자던 날이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토록 다짐을 나누던 말들이었는데... 이번엔 천재지변인가.


같은 일이 두 번 연속적으로 일어나면 세 번째는 마음 한편이 미리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전과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되겠네. 이번에도 함께 가는 건 어렵... 겠구나, 하고.      


이 정도 기온이면 산행 괜찮은 거지요?

 

전날 늦은 밤, 일행 중 멤버가 단톡방에 띄운 조심스러운 메시지를 신호탄으로 차마 먼저 밝히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던 속마음들이 차례차례 올라왔다. 겨울 산행 장비 부족(겨울산에 아이젠은 필수요, 스패츠는 선택이나 10cm나 쌓일 눈에는 필수로 전환된다)과 가족들의 만류가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산행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목소리.


주 1회 북한산을 다닌 지 1년 반.

북한산의 변화무쌍한 사계를 보고 다시 세 계절이 흘러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북한산이 보여주는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을 만나왔다.

지천에 흐드러진 이름 모를 풀꽃들, 한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열을 가려주는 울창한 산림과 시원한 계곡, 정상에 올랐을 때 갑작스레 쏟아붓던 여름 장맛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색찬란한 무대복으로 갈아입는 가을 단풍, 눈과 범벅된 꽁꽁 언 흙길과 녹지 않은 눈을 망울망울 가지 끝에 걸친 겨울나무들...

솔직하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거리낌 없이 당당한 존재, 그 모습에 매번 반했다.


그러나, 이렇게 다채로운 북한산의 모습 중 아직 못 본 장면이 한 장 남아있었다.


눈이 내리는 북한산.

눈이 포슬포슬 내리며 몽글몽글 쌓여가는 북한산의 모습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산행 전날 눈이 온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만류하는 남편을 핑계 삼아 만일의 위험을 적당히 피해 왔다는 게 본심이겠다. 모르는 것은 불안하고 겪어보지 않은 경험은 위험하다. '하지 마' 마음이 먼저 보낸 신호에 움찔해 시도조차 못해 보고 놓쳐 버린 것들은 차고 넘친다.


50을 맞이하면서 세운 한 가지 마음가짐이 있다.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하는 게 낫다, 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북한산이 보고 싶었다. 최강 한파였던 날의 산행과 작년 겨울 한라산 설산 등반으로 내 등산 가능 조건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으니 좀 더 주의만 기울인다면 괜찮다. '해봐' 마음에 지지를 보내는 '괜찮아' 마음 추가하기. 망설이는 마음이 움틀 때 실행력에 힘을 싣는 주문이다.


작년 겨울, 딸과 함께 한라산 영실 코스를 다녀왔어요.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뒤따르던 딸이 방언을 뱉어내며 저리 앞서가더라구요. 이번에도 꼬시는 중이에요.^^ by  정혜영


 

대설주의보가 뜬 날 산에 간다고 하면 남편은 또 만류할 테고 그럼 '해봐'를 이기는 '하지 마'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것이다. '해봐' 마음을 독려하기 위해 두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하나, 남편에게 산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둘, 전날 남편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등산복을 미리 준비해 둔다.

전날 밤, 미리 다음날의 복장을 준비하는 것은 내 오랜 습관으로, 다음 날의 일정에 대해 스스로에게 미리 걸어두는 약속이다. 난 내일 아침 일찍 눈 오는 북한산을 보러 갈 거야,라는.


남편이 출근한 뒤 후다닥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일기예보대로 어여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심장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정말 10cm까지 쌓이기 전에 빨리 이동해야 한다. 빛의 속도로 미리 준비해 둔 등산복을 입고 등산 가방을 챙겼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스패츠를 꺼내 종아리에 둘렀다. 적당히 온도를 맞춘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도 잊지 않았다.


막 현관문을 나가려다 단톡방을 확인하니 기대치 않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제 늦은 저녁까지 산행을 갈지, 말지 고민하던 일행들이 출발했다며 준비하고 있으라 메시지였다. 동지까지 생겼다. 심장 언저리가 심하게 간지러워졌다.



눈 오는 날 북한산에 가겠다는 우리의 서설이 이렇게 장황할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를 가로막는 빌런이 하나 더 남았으니... 눈길 운전에 조심하며 도착한 북한산성탐방센터 앞에서 마주한 푯말,


'대설주의보로 인한 입산 통제'


어떤 봉우리에도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어찌나 격분했던지!


덕분에(?) 탐방 가능 구간이 제한적이었음에도 설산의 위용은 대단했다. 설산을 처음 본 일행 중 한 명이 연방 내지르던 "우와, 우와!" 감탄사에 분함과 아쉬움을 뭉쳐  내리는 청량한 공기 중에 날려버렸다.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하지 마'를 이긴 '해봐' 마음 덕분에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눈이 포슬포슬 쌓이는 북한산'을 만날 수 있었다. 북한산의 사계의 모습 중 비워져 있던 마지막 퍼즐을 채웠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늘도 반한다.

좋다.


북한산의 설경, 배송드려요~^^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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