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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Aug 10. 2022

40년대 생 엄마와 70년대 생 딸, 함께 산에 오르다


내게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학창 시절 친구들과 친정 엄마, 중학교 때 은사님이다. 우리 반 아이들과 방학 계획을 세우며 마음속 생각을 활자화하니 보고 싶은 마음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남편의 휴가에 맞춰 8월에 친정과 시댁을 찾아뵙기로 했지만, 그렇게 가족이 함께 움직이다 보면 가족을 건사하다 정작 에너지를 쏟아야 할 곳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 친정행 KTX에 홀로 몸을 실었다.


일요일에 산에 올라 찍은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몇 장 올릴 때마다 친정 엄마는 산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특히 북한산 계곡물에 발을 담근 사진을 보고 너무 부럽다 하셨다. 난 매주 가는 산인데 엄마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리적 거리는 가족 간의 작은 일상의 나눔조차 여의치 않게 한다.


혹시 몰라 캐리어에 등산화를 챙겨 넣었다. 올해 74세인 엄마가 산오를 가능성은 희박지만, 계곡물에 발 담그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산에 못 가더라도 좋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엄마와 단 둘이 외식하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신 후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널브러져 실컷 수다 떨기. 그것만으로도 내게 주어진 2박 3일은 오롯한 '쉼'의 시간일 터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내 캐리어에 든 등산화를 보고 좀 고민을 했다고 하셨다. 딸이 좋아하니 함께 산에 오르고는 싶지만, 산에 오른 지 너무 오래된 데다 노쇠해진 스스로의 몸 상태를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눈치채고 "등산화는 혹시나 해서 가져온 것"이라며 안심시켰지만 엄마 마음은 또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틀째 아침이 되자, 엄마는 "그냥 서서히 올라가 보자"라며 아침 일찍부터 산에 갈 채비를 하셨다. 우린 멀리 돌아가더라도 오르기에 가장 무난한 코스를 택해 함께 무등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크지 않은 길이었지만 70대 엄마에겐 평지가 아닌 길이 수월할 리 없었다.

"엄마, 언제든 힘들면 그냥 돌아가도 돼. 너무 무리하지 마."

"그래그래. 좀 힘들긴 하지만 산에 오니 진짜 좋구나! 이 맛에 네가 그렇게 매번 산에 가나 보다."

그렇게 엄마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산에 올랐다.


엄마는 예전 기억으로 중머리재('중봉'이라고도 부름, 617m) 정도까지는 오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만, 한 시간 여쯤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걸어 도착한 토끼등에서조차 좀 힘들어 보였다.

"엄마, 이 정도면 많이 왔어. 그만 내려가도 돼."

"내가 또 언제 이렇게 와 보겠냐.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더 가 보자."


그렇게 엄마와 난 무등산 토끼등을 거쳐 중머리재를 향해 다시 천천히 올랐다. 토끼등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흙과 돌이 있는 오르막 산길이었지만 엄마는 생각보다 잘 올라 주셨다. 엄마가 힘들어할 때마다 쉴 때면 난 여전히 내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엄마는 다시 못 올 길이라며 멈추지 않으셨다. 오르는 도중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엄마 목소리에는 숨은 턱에 차지만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자네, 내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 줄 아능가? 내가 무등산 중봉에 올라가고 있다니께. 나 대단하지?"


그렇게 엄마는 대단하게도 617m인 무등산 중머리재에 오르셨다. 과거의 엄마(나)와 미래의 내(엄마)가 나란히 담긴 사진을 보니 어쩐지 뭉클했다.


엄마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셨지만 역사는 사진으로 남겨야 옳지요^^ by 그루잠
40년생 엄마와 70년생 딸, 함께 산에 오르다 by 그루잠


엄마는 마지막으로 무등산에 오른 뒤 14년이 지났다고 하셨다. 60세를 마지막으로 무등산과는 이제 연이 끝난 줄 알았노라 하셨다. 10년이 넘어 올라보니 과거 엄마의 기억 속 중머리재와 달라진 모습에도 신기해하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엄마는 하산 길을 더 힘들어하셨다. 내려올 때 무릎 관절에 더 무리가 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하산 길에 만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목에 대시고는 비로소 "살 것 같다"라고 하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늙은이랑 오느라 팍팍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네가 고생했다."

"무슨~ 엄마를 보니 계속 관리만 하면 나도 70대까지도 산에 오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구먼."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내릴 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는데, 복병은 산을 다 내려오니 있었다. 녹초가 되신 엄마의 몸도 걱정되고 날도 더워 택시를 잡아 타고 돌아가자는 내 의견과 버스를 타면 되는 걸 왜 비싼 돈을 쓰냐는 엄마의 의견이 충돌한 것이다.


70대 엄마의 고집을 꺾기엔 50인 나는 너무 젊었다. 한 시간 여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노곤해진 나는 엄마 옆자리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엄마는 아무리 피곤하셔도 버스를 타고 주무시는 법이 없다. 그에 반해 나는 버스 석에 앉았다 하면 잠이 온다. 엄마가 절대 안 주무실 것을 알기에 하차할 곳을 놓칠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70년생 딸은 40년생 엄마를 의지해 잠을 청했다.     


엄마는 등산 후 2~3일이 지나자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아팠다고 하셨다. 너무 무리했다고, 너무 힘들면 병원에라도 다녀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내 걱정에, 엄마는 "영광의 상처"라며 웃으셨다. 지인들께 무등산에 오른 무용담을 전하는 것도 즐거움이라 하셨다. 무엇보다, 끝까지 못 오를 줄 알았는데 결국 중리재까지 오른 자신이 기특하다고 하셨다. 내 덕분이라고도 하셨다.


나이가 드실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의 교류를 줄여가시는 엄마.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어지면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그렇게 자존감도 점점 떨어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원거리에 떨어져 사는 딸인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이번에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노모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뭔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식과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사람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만 있다면 잘못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며 주었던 큰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려야 할 때. 모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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