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Sep 17. 2023

엄마의 늙은 손은 보이는 것보다 아름답고 강하다

딸의 결혼을 축연 하는 친정 엄마의 오카리나 연주


배워서 남주냐고 하지만 남 주려고 배우는 사람들이 교사들이다. 설혹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어느 정도 기량이 쌓이면 누군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이다. 실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본인의 실력을 한 단계 높이 견고하게 하는 최고의 지름길이다. 주춤했던 코로나 기간 3년을 빼더라도 한국식 오카리나와 인연을 맺은 지  년째이니 이제 내 실력을 한층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라도 전파의 수순을 밟을 때가 되었다.


실력이 좀 더 는 다음에 해야지, 여전히 악보 읽기도 미숙하고 곡의 박자나 리듬 숙지도 약한 내가 누굴 가르친다고... 하는 생각에 선뜻 성인을 가르친다는 생각은 미루고 미뤘던 일이었다. 내 미숙함을 핑계로 언제까지 미루기만 할 것인가. 그래서 올해는 학년 초, 교사 동아리 지원 계획 안내에 용기를 내어 한국식 오카리나 교사 동아리 운영을 자원했다. 이태리식 오카리나에 익숙한 동료 교사들에게 운지법과 연주 방식이 다른 한국식 오카리나를 가르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미숙하게나마 한 곡을 마치고 함께 연주할 때의 뿌듯함. 그것은 배움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늘 함께하는 감동이다.


주 1회 1시간 연습으로 드라마틱하게 연주 실력이 늘기는 어렵다. 그래도 동아리 회원들이 애써 배운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손가락으로 한 곡, 한 곡 익혀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2학기 첫 동아리 시간, 방학 동안 잊어버린 운지법을 다시 기억해 내느라 방황하는 C 선생님의 손가락 운지를 봐주고 있을 때였다.


"어머, 어쩜 손이 이렇게 고와?"


C 선생님 옆에 앉아 있던 J는 평소에도 세상 모든 일에 감사하고 감탄하는 사람이다. 그런 J가 누군가를 칭찬한다는 것은 절반은 진실이요, 나머지 절반은 스스로 가진 미덕의 발현이다. 그것을 감안해도 나와 비슷한 연배인 C 선생님의 손가락은 정말 곡주를 만드느라 평생 누룩을 빚어온 사람의 손처럼 매끈했다. 알맞은 크기의 손톱은 가지런했고 흔한 매니큐어 자국하나 없는데도 손톱의 발색은 고르게 고왔다. 방황하는 그녀의 손가락 운지를 짚어주려던 내 손가락이 주춤하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녀의 손가락과 비교되는 내 손가락의 볼품없음에 와락 부끄러움이 몰려온 것이다.


쭈글쭈글하다. 푸석푸석하다. 주름 투성이에 얇고 볼품없는 거죽.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빈한함. 내 손을 미화해 줄 가장 고운 형용사라면 '작다' 정도이려나. '작다'가 '곱다'와 일맥상통하려면 그 사이에 상당한 맥락이 필요하겠지만, 앞서 먼저 떠오른 다른 형용사들에 비하면 충분히 곱고도 겠다.


청춘도 아닌데 외형이 뭣이 중헌디, 싶다가도 빈곤한 내 손을 보니 마음이 쪼그라든다. 얼굴은 화장을 하거나 얼굴 마사지라도 받거나 여력이 없다면 짓는 표정으로라도 빈약한 속을 가려볼 수 있으련만. 손은 돌보지 못할 만큼 여유 없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여 일순 민망해지는 것이다. 젊었을 땐 크기나 굵기가 제법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은데 세월의 무게를 못 견디고 뭐가 급했는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버린 손나이가 마냥 야속하다.


낯익다... 했는데 친정 엄마 손이다. 얼굴 생김새도 성격도 닮은 데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손은 영락없이 친정 엄마 것이다. 속에서 천불이 나던 사춘기 때도 고생의 흔적을 숨기지 못하는 엄마의 손을 볼 때면 들끓던 마음 냄비에 절로 찬물이 확 끼얹어지곤 했었다. 쉼이 없는 엄마의 손은 가진 것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돌볼 여유는 더 없는, 나이 먹은 여자의 손이었다.


여자들의 삶이 30년 전과는 상당 부분 달라졌을 텐데도 세월의 장사는 친정 엄마보다는 고생을 덜한 내 손도 기어이 엄마의 손을 닮아가게 다. 여전히 나와 여동생을 '젊은 니들'이라고 칭하는 엄마가 딸의 고목 같은 손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흔들리실까.



함께 활동하는 한국식 오카리나 교원 앙상블 회원 중 한 분인 L선생님이 오늘 외동딸을 결혼시키셨다. 엄마로서 의미 있는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예식장에서 오카리나를 연주기로 하셨다. 꽤 오래 회원 활동을 해 오신 분이시라 연습만 충분히 하신다면 독주 연주가 가능하신 분이셨는데, 막상 결혼식이 다가오니 너무 떨려서 다른 회원들에게 SOS를 요청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여력이 있는 회원 6명이 급히 합류하게 되었다.


혼주이신 L 선생님이 연주하고자 하신 곡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L선생님이 곡을 시작하며 앞부분을 연주하 회원들이 자연스럽게 중반부터 화음을 넣어 연주했다. 기본 MR에 맞춰 결혼 당사자인 딸이 피아노 반주를 쳐주는 이색적인 축하 공연이었다. 딸의 반주에 맞춰 연주를 시작하시는 L 선생님의 오카리나는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L 선생님 바로 옆에 섰던 내게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호흡 소리까지 전해져 왔다. 30년이 넘게 금이야 옥이야 길러 시집보내는 엄마의 만감이 오카리나 소리에 실려 식장을 가득 채웠다.


딸의 결혼식, 초청한 많은 친인척들 앞에서 연주할 곡이었으니 얼마나 많이 연습하셨을까. 그럼에도 한 남자의 아내이자 미래의 또 다른 엄마가 될 운명인 딸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엄마의 마음이 어찌 차분하기만 했을까.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그녀의 손 역시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을 테다. 딸의 행복을 기원하는 엄마의 마음이 빚어내는 소리는 떨림조차 아름답게 만들었다.


결혼식을 다녀와서 늙어버린 손이 더는 밉지 않아 보이는 것은 늙은 손이 전해 주는 더 강한 힘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내 딸의 결혼식에서 연주를 하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떨리고 설레는 상상만으로도 오늘은 주름투성이인 내 손에 애정이 간다. 


엄마의 늙은 손은 보이는 것보다 아름답고 강하다.





  

이전 13화 매일 카톡 프사를 바꾸고 알게 된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