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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Dec 23. 2023

10분의 선심에 100시간의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가까이 있는 행복을 최대한 증폭시켜 누리기

* 이 매거진에 쓰인 모든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임을 밝혀둡니다.


눈이 내리면 가장 신나는 것은?

'강아지'와 '아이들'이라는 답을 쉽게 내놓을 것이다. 이 말의 근거를 찾아본 적이 있는가? 동물병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들어가 살펴보니, 과연 개가 눈을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강아지들이 눈을 보고 흥분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변화를 즐기는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개는 낯선 경치, 지형, 냄새, 사물 등에 굉장한 호기심을 보이는 모험가 기질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평상시와 별다를 것 없는 장소에 갑작스럽게 내리는 눈을 보면 신선하고 재밌는 존재로 느낀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눈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다. 직접 만져보고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모험가 기질을 가진 아이들이 하늘에서 구름 조각을 한점 한점 떼어 세상으로 흩뿌리는 듯한 광경에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연일 아침 기온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에 이불 밖은 위험한 이 이어지고 있지만, 밤새 내린 눈이 쌓인 아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렸을 때, 집 문을 열었더니 온통 흰 눈으로 온 세상이 덮인 날, 얼마나 신나고 설렜었는지. 요즘 아이들이 아무리 '디지털본' 세대들이라고는 하나, 어릴 적 내 눈에 비추었던 눈이 지금의 눈과 별반 다르지 않듯, 눈을 향한 아이들의 기대와 설렘도 다르지 않다.


귀마개와 장갑, 두툼한 롱패딩으로 온몸을 감싸고 등교한 아이들은 당장 눈밭에 굴러도 괜찮을 차림새였다. 1교시 수업을 하는 동안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안 되었다. 아이들에겐 눈이 녹기 전에 잠시라도 그것을 만끽할 시간이 필요하다. 1교시가 끝나갈 무렵, "쉬는 시간 10분만 밖에서 놀고 와도 좋다"고 했다. 꺅! 하는 아이들의 환호성에 귀가 쟁쟁해졌다. 담임이 무심히 건넨 10분의 선심에 아이들은 100시간의 효과를 누렸다는 걸 아이들의 글을 보고 알았다.


오늘 등굣길에 눈이 내렸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눈이 쌓여 있어서 학교를 같이 가는 친구들과 놀면서 등교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 가서도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 끝나고 놀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 마음을 아셨는지 1교시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된다고 하셨다. 너무 신이 났다. 나와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리고 하교해서도 집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지은이랑 눈덩이도 만들고 눈슬라이딩 등을 했다. 바지가 다 젖어서 축축했지만 너무 신나는 날이었다.
나는 집에서 나가자마자 엄청난 광경을 봤다. 왜냐하면 밖에 하루 만에 눈이 쌓였기 때문이다. 오늘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도 된다고 해서 우리 반 절반이 나갔다. 그래서 나도 친구들과 놀려고 밖으로 나갔다. 장갑이 있는 주머니를 살폈는데 장갑이 없어서 당황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친구랑 놀려고 장갑을 다른 가방에 넣었(던 것이)다. 정말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눈뭉치를 만들었는데 손이 너~~~ 무 차가워 잠바 안에다가 손을 넣었다. 근데 잠바 안에 손을 넣어도 손이 추워 손도 빨개지고 귀도 빨개져서 빨강 파티였다.


옷에 조금만 뭐가 묻어도 못 참는 깔끔이 주성이가 바지가 다 젖어 축축해도 신났다니, 눈의 위력은 대단하다. 차가울 걸 알면서도 장갑이 없으면 맨손으로라도 만질 수밖에 없는 게 새하얀 눈의 마력이다. 덕분에 온통 빨개진 손과 귀를 보고 '빨강 파티'였다니. 아이들은 눈에 관한 한 한없이 관대해진다. 10분을 100시간처럼 누리기. 가까이 있는 행복을 최대한 증폭시켜 마음껏 누리기에 어린이의 표정이 그렇게 다채로운 것이리라.


매일 아침 1교시 시작종이 울리면, 아이들과 나는 두 손을 배꼽에 공손히 모으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나눈다.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제 우리가 함께 할 날이 며칠 남았는지 이야기해 주고 있다. 남은 날이 많지 않으니 서로에게 아쉽지 않도록 더 잘해 주자고. 그 말을 들을 때 아이들이 보여주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진지한 눈빛에 살짝 감동받았었는데, 쉬는 시간이 되면 여전히 아옹다옹, 이르러 오기 일쑤다. 녀석들, 이래서 어떻게 3학년 형아들이 되려나.

급기야 오늘 아침엔 칠판에 '인연'이라는 글자를 썼다. 말로만 하면 발음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매일 자그락거리는 아홉 살에게도 인연은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욕심이었나.  

 

아이들의 글을 보며 쓰지 않은 마음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교실이라는 넓지 않은 공간에서 일 년 동안의 긴 시간을 함께 하면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한 글쓰기가 아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 반은 일주일에 두 번 도란도란 이야기를 쓴다. 주제가 있거나 자유 주제인데 난 어려울 때는 자유 주제를 쓴다. 친구네 반은 도란을 안 쓴다고 해서 부럽기도 했다. 솔직히 가끔은 쓰는 게 귀찮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쓰니까 기억이 안 나는 날은 도란 공책을 보면 가끔 생각이 나서 좋은 것 같다.
도란 노트를 쓰면서 느낀 점은, 뭔가 사소한 일도 일기처럼 쓰게 돼서 기분이 좋았다. 왜냐면 나는 사소한 일은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소한 일도 이~렇게! 많이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처음 도란을 썼을 땐 너무 귀찮고 힘들어서 하기 싫었는데 이젠 내가 글쓰기에 재미가 붙은 것 같아서 기분이 정말 정말 좋다.
내가 도란 노트에 진실을 얼마만큼 풀 수 있냐면, '엄마, 아빠, 동생, 도란 노트'에게만 진실을 풀 수 있다. 그리고 무슨 힘든 일이 있어도 선생님의 멘트를 보면 힘이 불끈불끈 난다.
나는 2학년이 되면서부터 도란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도란 노트는 일기와 비슷하게 경험, 생각, 느낌 등을 써야 하는 글짓기이다. 초반에는 선생님께서 2~3줄 정도 쓰라고 하셨었는데 어느새 점점 늘어나 요즘에는 10줄 이상씩 쓰고 있다. 사실 나는 도란 노트를 쓰기 힘들었는데 계속 연습하고 쓰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다. 2학년이 끝날 때쯤이면 더 잘 쓰겠지?


담임 선생님이 시킨 일이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글쓰기를 할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담임 잘못 만나(!) 일 년 내내 글쓰기를 해야 했던 우리 반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글쓰기가 놀이일 리는 만무했다. 그럼에도, 귀찮고 힘들지만 하나, 둘 차곡차곡 글을 쌓아 나갔을 때 어떤 변화가 오는지 알게 하고 싶었다. 걱정은 모두 맡겨 두고 푹 잠들라는 과테말라의 걱정 인형처럼, 글쓰기로 아이들의 행복은 배가 되고 근심과 걱정은 줄어들기를 바랐다.


현민이는 글로 써서 잊고 있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민재는 글쓰기에 재미를 붙였다고 하니, 큰 성취를 이룬 듯 기쁘다. 수영이에게는 도란 노트가 진실을 풀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라, 나와 헤어지고도 자발적으로 글쓰기를 이어가길 기대해도 될까. 원재는 2학년이 끝날 즈음 더 잘 쓰지 않을까, 기대를 비쳤지만 원재의 글이 이제 더 이상 저학년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만 모르는 것 같다.   


글 덕분에 아이들과의 인연이 더 깊어지니 난 내년에도 아이들과 글쓰기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 스며들듯 글며드는 글쓰기. 나도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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