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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Jul 19. 2021

역사탐방에세이 18화

 신덕왕후 정릉(貞陵) – 친아들을 세자로 세운 죄

   헌릉을 나오며 다음 탐방 장소는 자연스레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으로 정해졌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태종 이방원에 의한 또 한 명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은 중종의 능호 정릉(靖陵)과 한글 표기는 같으나, 한자로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은 ‘곧을’ 정(貞)자를 쓰고, 중종의 정릉(靖陵)은 ‘편안할’ 정(靖)자를 쓴다.      

 

신덕왕후 정릉 안내표지판

  “신덕왕후 강씨가 이방원하고 원래 앙숙이었나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까지는 협력관계였어요.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이방원이 최초로 성균관 입학생인데, 그때 신덕왕후 강씨와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요?”

  “강씨가 이방원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어찌 내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고’ 하면서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렇다면 신덕왕후도 이방원이가 특출나게 잘났다는 것을 인정한 셈인데, 왜 이방원하고 척을 지면서 자기 아들을 세자로 세웠을까?”

  “신덕왕후는 자기의 지분이 이방원의 지분보다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뱃속에서 낳은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받게 하고 싶은 모정이 작용했겠지요.”

  “어떻게 보면 꼭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면 하는 것도 욕심인데, 그 욕심이 결국 그 사단을 만들었네.”     

  

  함흥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는 원의 동녕부를 원정해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이름을 드높여 드디어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진출하였다. 이성계는 최영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만한 장수였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배경으로 인해 한계를 느꼈고, 그런 그의 손을 잡아준 게 개성의 권문세족 집안 출신이었던 신덕왕후 강씨다.

   고려 시대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토호들이 수도인 개경에 부인을 두는 일이 흔해, 고향에 있는 부인을 ‘향처’라 하고, 개경에 있는 부인을 ‘경처’라 하였다. 이성계의 ‘경처’가 된 강씨는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녀는 친정의 힘과 재물과 인맥을 활용해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신덕왕후 강씨는 모든 것을 걸고 한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창업하는 데에 힘을 보탠 이성계의 동지이자 개국 공신이었다.

  이성계의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가 개국 10개월 전인 1391년에 사망하였기에 신덕왕후 강씨가 실질적인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조선 개국 초에 신덕왕후 강씨가 누렸던 권세와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게 바로 겨우 11세인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이다. 천하의 이방원도 신덕왕후 생전에는 속으로는 이를 갈았을망정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증거가 바로 정릉이 최초에 자리 잡았던 위치다. 신덕왕후 강씨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 영내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를 그곳으로 보고 있다. 신덕왕후 강씨가 갑자기 사망하자 태조 이성계는 ‘왕릉은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조성해야 한다’는 규범도 무시한 채 경복궁과 근접한 도성 안에 신덕왕후 무덤 터를 정하였다. 신하들이 반대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다. 태조 이성계는 능호를 ‘정릉’이라 정하고, 나중에 본인이 죽은 후에는 신덕왕후 강씨 봉분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죽어도 못 보내’하는 심정이었나 보다. 얼마나 신덕왕후 강씨를 애틋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은 가도 전설은 남는 것처럼 정릉은 ‘정동’이라는 지명을 남겼다. ‘정동’은 ‘정릉이 있던 동네’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왕릉 터만 고집한 게 아니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릉 옆에다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비는 원찰 흥천사를 창건했다. 원찰이란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우는 사찰을 말한다. 생각해 보라. 숭유억불 정책을 통치체제로 내세워 탄생한 조선이다. 그런데 개국 시조가 왕비 무덤을 궁궐 코앞에다 조성하는 것도 모자라 죽은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덤 옆에다 사찰을 창건하겠다고 한다. 유생들이 가만있었겠는가. 들고 일어남이 당연하다. 그러나 아내를 향한 이성계의 고집을 못 말렸으니,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했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이성계는 강 씨 사망 후 정릉에 재 올리는 범종 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1408년 5월 24일에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였다. 1409년 태종 이방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덕왕후의 능을 파헤치라 명했다. 명분이야 있었다.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 이복동생 둘을 죽이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아니면 그만큼 이방원의 분노가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던 것인지,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계모의 능을 파헤쳐 옮기라 명했다. 옮겨간 곳이 어딘지 정확한 장소조차 모르다가 선조 대에야 파악되었다고 하니, 태종 이방원의 뒤끝 작렬은 인정해 줘야겠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열외로 치더라도, 아버지, 조강지처, 며느리에게 연달아 피눈물을 흘리게 하더니, 죽은 계모의 무덤까지 손을 대었다. 원래 모진 사람이었는지, 왕의 자리에 앉기까지 맺힌 게 많아서 그런 건지…….


신덕왕후 정릉 홍살문 - 홍살문 앞에서  정자각까지의 신도가 직각으로 꺾여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조성되었는데요.”

  정릉의 능침을 바라보니, 규모가 작긴 해도 아담하고 그렇게 격이 낮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정릉을 탐방하기 전에 광통교를 탐방하면서 이미 태종 이방원의 뒤끝 작렬에 대해 성토한 후라 저도 모르게 다른 왕릉과 비교하고 있었다. 


광통교 교각으로 쓰인 정릉의 석물들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옮겨 태평관 누각을 짓고 봉분의 흔적도 없앴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봉분을 남겨 두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는 작업도 착수했는데,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를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해 신위를 모시지 않았다.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폄하는 더 나아가, 1410년 8월 홍수로 흙으로 만든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허락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비록 신덕왕후 강씨가 계모이기는 하나, 한 나라의 건국 시조의 왕비였다. 그 왕비의 무덤을 감싸고 장식했던 병풍석을 비롯한 석물들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만들다니. 과연 태종 이방원답다. 내가 태종 이방원을 ‘뒤끝 작렬 왕’이라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계천이 복원될 때 광통교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조선 최초 왕릉인 정릉의 병풍석과 석물 조각들을 확인할 수 있다. 600여 년이 넘었음에도 보존 상태가 좋아 태조 이성계가 얼마나 정릉 조성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능은 현종 대에 예학을 강조한 송시열 등이 건의로 다시 조성된 것이다. 신덕왕후의 무덤이 어디에 조성되었는지 장소조차 모르다 선조 대에야 파악되었다고 하는데, 옮겨간 무덤이 얼마나 허술하기 짝이 없었겠는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덕왕후 강씨가 이방원에게 그렇게 능욕에 가까운 모진 대접을 받아야 했나 싶어요.”

  “아들이 둘이나 죽임을 당한 것도 모자라 아무리 사후라 해도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혼이 있다면 천 년이 지난들 용서가 될까 싶네.”


  종묘에서 신위가 내쳐지고 왕릉은 파헤쳐져 지금의 정릉 골짜기에 버려진 듯 초라하게 방치되어도 조선왕조의 왕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왕조의 왕위는 태종 이방원의 직계후손들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조 대 이후 신하들이 나섰다. 선조 대는 예학이 성리학의 주류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현종 대에 정통 명분주의자인 송시열 등이 신덕왕후 강씨의 복위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현종 10년(1669년)에 신덕왕후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리고 무덤도 능의 수준에 맞게 다시 조성되었다. 이방원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종묘에서 신위마저 내쳐진 지 260년 흐른 시점이었다.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최초의 왕비였고, 경복궁 근처에 있던 정릉은 태조 이성계가 공을 들여 조성했던 조선 최초의 왕릉이었다. 신덕왕후 강 씨는 태조 이성계에게 충실한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였다. 아무리 뒤끝 작렬 이방원이지만,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이방원을 제치고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될 만큼의 죄였을까. 그녀가 오래 살았다면 과연 이방원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정자각 너머로 보이는 신덕왕후 능침


  “마, 다 풀고 편히 쉬세요. 그런 사랑을 받았으니. 그런 사랑 아무나 못 받습니다.”

  정릉에서 조석으로 올리는 재를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들어야 수라를 들었다는 태조 이성계의 사랑을 거론하던 지호맘이 정릉의 능침을 향해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맞습니다. 그 사랑이 부럽기도 합니다.”

  경찬맘도 한마디 보탰다. 

  “천 년이 간들 내 새끼 죽인 원한이 씻길까요? 그래도 잊어야지 어쩌겠어요.”

  나도 거들었다. 

  “나는 요즘 왕릉을 탐방하면서 내가 평범해서 너무 좋다는 것을 느껴요. 왕이나 왕비들의 삶이 하나도 부럽지 않고, 어쩌면 다들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했을까 안타깝다니까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위대한 삶일 수도 있어요.”

  “그러게요. 오늘 정릉도 참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요.”

  우리는 정릉을 나오고도 아쉬움이 남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할 당시의 흥천사는 아니지만,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가 근처에 있다길래 들렀다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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